바람길따라서

함양 일두 정여창선생고택

다보등 2010. 5. 28. 13:35

함양 일두 정여창고택(국가지정문화재 정병호가옥)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정여창고택은 안의에서 함양읍으로 가는 국도변 중간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양반가옥이 밀집되어 안동의 하회마을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흔히 뼈대 있는 고장을 말할 때‘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한다.

함양은 안동과 더불어 학문과 문벌이 번성했던 양반의 고장이다. 이‘우 함양’의 기틀을 잡은 분이 정여창이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그때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하였다.

성종 21년(1490)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연산군의 총애는 받지 못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정원이 예뻐서 잠시 들여다 본 집.....^^;;

 

 

 

 

 

 

충효의 가문임을 알리는 홍살문 

 

 

 

조선 성종때의 대학자였던 문헌공(文獻公) 일두 정여창(1450-1504)선생의 고택이었지만 지금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중건한 것들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 정병호(일두의 17세손, 亡)의 고조부가 중건하였다 하며,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300년 더 올라가 청하현감을 지낸 선대가 중건 하였다고 전한다. 

 

 

'ㄱ'자형의 사랑채이며 마당에서 마루까지가 상당히 높다.

 

 

사랑채에는 "충효절의", "백세청풍" 등의 글이 붙어 있는 대청이 높직한 댓돌위에 지그시 앉아 있는것 같이 보인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 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 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자료참조-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다시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비로소 'ㅡ'자형의 큼지막한 안채가 있다. 직접적으로 바깥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게 되어있다.

 

잠시 뒤돌아 본......^^*

 

안채쪽에서 사랑채로 나가는 중문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통나무를 있는 그대로 쓴 큼지막한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안곳간채>안채에서 쓰이던 재물이나 소용품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마련해 두는 일이 요긴하여서 잘 사는 집에는 여러가지 곳간이 필요하였다.

이 곳간의 가운데 곳간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세간살이를 오른쪽은 식료품 및 그에 따른 살림살이를 보관하여 왔다.

 

 

사랑채가 동편을 가려 줌으로 인하여 안채의 배치구조는 다른 건물들과 어울려져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2007년 5월 이곳을 답사차 "부산민학회'와 함께 들렀었다. 그 당시는 한창 개평마을이 한옥마을로 변신중이었다.

여기저기 새로 담을 내고 한옥을 다시 짓고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깔끔한 한옥마을에 넓은 주차장까지 완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