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따라 떠나는 여행/서해안을 따라 우리 국토를 걷는다

전북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흥덕 신덕리 목우마을/ 서해안을 걷는다 3차

다보등 2014. 5. 20. 14:00

전북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 흥덕면 신덕리 목우마을/서해안을 걷는다 3차 

 

 

 

 

 

 

서해안을 걷는다 3차째 둘째날 새벽 6시...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나 선운사엘 다녀 오는 것으로 아침을 열기로 하였다.숙소가 선운사입구에 있는 덕분이기도 하다.

밤새 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촉촉하게 물기 머금은 길이다.

선운사엘 오르면서 내내 송창식의 '선운사에서'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도반 누군가가 스마트폰을 열어 그 노래를 들려 준다.

참 좋다....

 

선운사/송창식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에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에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초파일을 앞둔 선운사엔 색색의 연등이 메달려 있어 봄날 아침을 화려하게 빛내준다.

 

 

 

 

 

아침을 먹고 어제 마쳤던 하전리로 다시 갔다.

경남 양산에서 오신 부부선생님의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 낭송을 잠시 듣고 본격적으로 하전리 갯벌을 끼고 걷기 시작을 하였다.

드넓은 곰소만의 갯벌은 우리에게 풍요를 약속하는 것 같다.

어제 밤부터 오락가락 하던 비는 여전히 간간히 오다말다 우산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선운사 동구/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검단선사의 전설과 소금전시관이 있는 '염정마을'을 지나 '좌치나루'까지 걷는다. 좌치나루는 고창군 심원면과 부안면을 연결하던 조선시대의 나루터로 꿩이 앉아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어제오늘 장어이름을 내건 식당을 많이도 본다.

그나저나 한번 맛은 봐야 할 것인데...ㅎ

 

 

 

 

 

 

 

풍천장어라는 이름이 붙여진 근원이 이곳이란다.

인천강은 풍천장어의 산지인 것이다.

강에 쳐져 있는 그물은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뱀장어 새끼를 잡기위한 그물이란다.

머리카락같은 치어를 잡을려니 그물코가 엄청나게 촘촘하다.

 

 

 

 

 

 

 

고창에는 선운산과 소요산이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산이 소요산이다.

동학혁명 선봉장 전봉준의 부친이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전봉준이 태어났다하여 신비스러움을 전해주는 산이란다.

 

 

 

 

 

인천강을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을 하여 미당 시문학관을 찾았다. 시문학관은 곱게 단장이 잘 되어 있다.

미당 시 문학관은 2001년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미당의 생가(生家)와 묘역이 부근에 있다. 질마재 마을에 있는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 분교를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문학관입구는 "나의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미당 서정주의 '자화상'이 눈길을 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시어로 써진 미당의 시는 수백번 읽어도 언어의 마술사답게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각과 양지만을 지향하는 행위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고 평했는지도 모른다.

 

 

 

 

 

 

 

 

 

 

 

 

<손화중 피체지>

전봉준, 김계남장군과 함께 동학의 지도자였던 손화중장군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씨 재실로 추정되는 이곳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되어 36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줄기차게 내린다.

그 비속에 걸어서 만정 김소희 생가에 다달았다.

평생을 국악진흥에 매진했던 분이다.

 

 

 

 

 

 

 

 

 

 

 

 

빗속을 걷느라 무거워진 몸이었다. 많이 지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많이 지쳤을 도반들의 표정만큼은 언제나 맑음이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 목우마을에서 서해안을 걷다 3차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