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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말아줘> 알릭스 가랭 지음

다보등 2025. 2. 24. 06:22

서울아트책보고에서 한나절 시간을 보내던 날, 우연히 눈에 띄어 읽은 책이다. 책은 224쪽으로 크고 두껍고 무거웠고, 그림책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만화책이다. 만화책답게 일단 글자보다 그림과 말 풍선으로 된 책이라 짧은 시간 읽기엔 적절한 책인 것 같아 앉아서 읽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잡은 책이지만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은 내용에 점점 책 속에 빠져 들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할머니 같았고, 엄마 같았고, 클레망스였다. 긴 여운이 남았던 책이다. 

 

 

할머니, 엄마 그리고 손녀(클레망스) 3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

엄마(미혼모)와 클레망스는 언제부턴가 사이가 소원해졌다. 

클레망스의 할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돌아 가셨고,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병으로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자주 도망을 쳐서 관계자들이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벌써 세 번 째이고 네 번 째는 없을 거라며, 도망칠 때마다 할머니에게 닥칠 위험에 대해서 시설이 책임을 져야 하므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거라 한다. 그 조치라는 게 진정작용이 있는 가벼운(?) 화학요법이라는 거다.

"진정제라고요?"

그 방법이 최선이라며 "아니면 댁으로 모시겠어요?"  

오랜 고심 끝에 엄마는 결국 병원의 제안에 대해 싸인을 했다.

 

"할머니 왜 그랬어?"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엄마 아빠가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할머니가 도망쳤어. 요양원으로 오렴.

 

할머니 여름옷을 가져다주려고 다시 요양원을 찾은 클레망스는 충동적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요양원을 빠져나온다. 요양원에서 절망 앞에 놓인 그녀를 구출해 할머니의 불확실한 유년시절의 집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최근 몇 달간 할머니가 정말 자주 말씀하셨기 때문에 대충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있었던 할머니가 어릴 때 살던 집.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할머니가 마음에 담아두던 그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다

가끔은 할머니가 클레망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냐고 난리를 치기도 하면서, 차에서 자기도 하고 호텔에서 자기도 하며 바다가 보인다는 그 마을을 찾아 먼 길을 간다. 그러면서 오래전 할머니와 행복했던 클레망스의 어린 시절도 추억하고,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야기도 듣게 된다.

클레망스는 의사인 엄마 대신 조부모와 긴 시간을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겐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나는 엄마가 때때로 자신의 지난 삶을 후회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녀가 홀로 있을 때면 그 모든 후회들이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낱알을 뿌려두고 그것을 쪼아대는 새들을 관찰하기 위해 몸을 숨길 때처럼.

침묵에 숨이 막힌다.'

 

물망초 꽃말 '나를 잊지 말아줘'

 

물망초꽃을 꺾어 차에 치장하는 할머니 "이 물망초 별명이 뭔지 아니?".... "나를 잊지 말아 줘..."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할머니는 바다가 있는 엽서를 한 장 샀다.

"누구한테 보내려고?"

"아빠한테.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할머니가 바로 이걸 고르다니 좀 놀라운데?"

"어렸을 때,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사촌들이랑 우리를 해수욕장에 데려갔었는데, 그게 여기 같아서."

 

할머니는 바다가 보이는 엽서를 우편함에 넣는다.

 

 

그리고 며칠 만에 드디어 바다가 있는 곳에 도착을 하였다. 

 

"우리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니?" 

"아니."

"마리루이즈, 날 위해 바다에 입 맞춰 다오."

"바다를 볼 때마다 엄마와 그 말이 떠올라."

"그럼, 진짜 바다에 입 맞추러 가 볼까?"

 

"클레망스,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것 같구나."

 

우리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니?

 

관자놀이 부근이 두근댈 정도로 흥분이 일었다.

우리 앞에 밀려오고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가슴이 뛰었다.

이토록 현재를 체감한 적은 없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히 느꼈다.

 

클레망스,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을 전혀 하지 못했어.

수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야.

'너무 늦은 때'라는 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법이다.

클레망스, 이 말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너무 늦은 때라는 건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기, 바로 저 길 끝이야

 

 

끝이 보이는 이 여정에서 클레망스가 깨달은 건 과연 무엇일까?

 

할머니의 집을 찾아 가면서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엄마)에게 할 말이 무척 많다.

아니, 사실은 많은 게 아냐.

단 하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사랑해.

 

 

 

집으로 돌아온 클레망스.

집을 비운 동안 우편물이 수북하다.

그 우편물 속에서 보낸 이가 없는 엽서가 하나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촌들이랑 우리를 해수욕장에 데려갔었는데, 그게 여기 같아서..."

할머니의  아빠에게 보내겠다던 그 엽서다. 

 

물망초 꽃말이 뭔 줄 아니?

'나를 잊지 말아 줘!'

 

 

 

알릭스 가랭

1997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만화에 대한 자질을 보여, 리에주의 생뤽 고등예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018년, 생말로 만화 페스티벌에서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2018년 졸업 후 브뤼셀로 거쳐를 옮긴 알랙스 가랭은 만화 관련 회사에 취직한 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나를 잊지 말아줘>를 집필했다. 현재 브뤼셀에서 작업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