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주기 영회원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기신제향
광명문화원이 주최. 주관하고 광명시와 광명시의회에서 후원하는 제380주기 영회원 민회빈 강씨 제향이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에 영회원에서 열렸다. 영회원 민회빈 강씨 제향은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부 집전으로 국조오례의에 따른 전통 양식으로 진행되며, 제향일에 맞춰 1년에 단 한 번 영회원을 개방한다.
4월 30일 광명동굴 일원에서 사생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올망졸망 아이들이 모여서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미소가 절로 난다.
사생 주제 : 내가 꿈꾸는 광명동굴
아이들이 그리는 광명동굴은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하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숲으로 들어섰다. 연둣빛 울창한 숲은 싱그러움 그 자체다.
하루가 다르게 숲이 울창해지고 숲색은 짙어진다.
오늘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기신제향이 있는 날이라 호기심에 남편을 대동하고 영회원을 찾아가는 중이다.
광명누리길을 걷다보면 영회원 뒤쪽을 지나가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 광명동굴을 지나 광명누리길 보건소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즘은 광명동굴에서 가학산 주변만 짧게 걷곤 하여 보건소방향 광명누리길을 걷긴 정말 오랜 만이다.
그런데 와보니 영회원 뒤쪽이라 펜스도 있지만 당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안 보인다.
당황스럽다. 울타리를 바라보며 잠시 위쪽으로 이동을 하니 펜스를 끼고 길이 나있긴 하다.
아마도 이쪽 길로 영회원으로 접근하는 길은 아닌 것 같다. 나 같이 엉뚱한 사람은 없지 싶다. 그래도 길이 나있으니 다행 중 다행이다.
대신 영회원 입구를 찾아 펜스를 빙빙 돌아서 가야 해서 빤히 보면서도 영회원 입구로 가는 길이 멀었다. 2013년에 방영된 티비 드라마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에 대해 알게 되었었다. 마침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이 광명 구름산자락에 있어서 그때 영회원을 관심있게 둘러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펜스가 쳐져 있지 않았고 관리도 허술할 때였다. 그 생각만 하고 접근하였더니 이 사단이 난 거다.
어찌어찌 가다 보니 이 일대가 금천강씨 종중(宗中)의 묘역이다. 민혜빈은 우의정 강석기의 딸로 강감찬 장군 19대 손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8년 후 환국한 소현세자가 2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 후 강빈은 온갖 음해로 사약을 받고, 친가는 국문으로 금천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해 일가들이 본관을 바꾸거나 은둔 생활을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영회원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의 원(園)이다.
민회빈은 우의정 강석기의 딸로 인조 5년(1627)에 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고, 만 8년 만에(1646) 한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을 기다린 것은 가혹한 운명이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 고작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갑작스레 죽었다. 이듬해 강빈은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후에 인조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다. 첫째 경선군은 열아홉 살, 둘째 경완 군은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에서 죽었다. 4살이었던 셋째 경안군은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나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민회빈 강씨는 죽음과 함께 폐서인이 되어 서민으로 묻혀 소현세자의 곁이 아닌 강씨 문중의 선산에 묻혔다. 그래서 영회원은 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빈의 무덤은 처음에는 아주 초라한 무덤에 지나지 않았다. 숙종 때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세자빈 강씨에 대한 신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1718년(숙종 44년)에 이르러 강빈은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되었고, 그녀의 묘도 민회묘란 칭호를 받았다. 1750년(영조 26년) 영회원(永懷園)으로 개칭되었다. 묘 앞에는 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문석인(文石人)과 석수(石獸) 등이 있다. 강빈을 소현세자와 합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끝내 강빈은 남편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광명시 구름산 자락에 남았다.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은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다)
무덤은 초라하고 소박하지만 강빈은 결코 초라한 인물이 아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역 등을 통해서 재산을 불릴 줄 아는 실용성을 갖춘 현명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노온사저수지는 구름산을 걷다 보면 노온사저수지방향 이정표로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정작 저수지는 오늘 처음 본다.
낚시터가 조성되어 있다.
날씨도 좋고 경치도 아름다운 구름산자락에서 외롭게 오랜 시간을 홀로 묻혀 있는 가엾은 소현세자빈을 뵌 날이다.
* 조선왕릉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