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장거정 평전 본문

중미 3개국여행/그녀의 학습노트

장거정 평전

다보등 2019. 9. 9. 22:37

 

과 목 : 중국학 입문 

 

제목 : 장거정 평전 - 장거정과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여러 해 전 쿠바여행을 앞두고, 쿠바하면 역시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는 가야지 하는 마음에 도서관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빌려서 읽은 적이 있다. 책은 두꺼웠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역역한 낡은 책이었다. ‘평전’이라는 다소 무거운 책 제목이었으나 그냥 읽으면 되는 책이었으므로 부담 없이 대충대충 읽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여행 내내 체 게바라를 아는 체 할 수 있었다. 살면서 또 이렇게 ‘평전’이라는 책을 읽게 되는 날이 있을 줄 미쳐 몰랐다. 이번에 과제로 읽어야 할 ‘장거정 평전’은 그냥저냥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닌 책이므로 부담이 되었다. 독후감이란 걸 써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의례 그렇듯이 처음엔 등장인물도 많고 생소한 중국의 역사에 뭐가 뭔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은 채 그냥 읽었다. 읽다 보니 점점 빠져들게 되었고 장거정이 차츰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6월6일의 정변이후 부터는 재미가 더해졌다. 기다릴 줄 아는 그의 처신도 어찌 보면 비겁해 보이는 행동인 것 같아도 아직은 본인의 처지가 확고하지 않을 때이므로 긴 호흡으로 기다리는 것도 훌륭한 처신이라 여겨졌다.

 

장거정이란 인물은 명나라 중엽 이후에는 황실이 부진해 국가 기운이 크게 쇠퇴했다. 그때 한 인재가 출현해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쓰러져 가는 왕실의 수명을 72년이나 연장시켜 주었으니(목종 6년인 1572부터 숭정 17년인 1644년까지를 일컬음), 바로 대학사 장거정(1525~1582)이다.

 

중국사에서 명나라는 암흑기였다. 그런 암흑기에 장거정(1525~1582)의 개혁정치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다. 중국의 개혁은 혁명과 달리 주로 정치에 오랜 시간 참여했던 문인 관료들에 의해 실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실무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경전에 담긴 이상세계를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구현하려는 꿈을 갖게 된다. 개혁은 일시적인 욕심이나 무리한 추진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철학과 오랜 준비, 높은 도덕적 처신, 철저한 주변 관리가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도전이다. 더욱이 혼자만의 힘으로 결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장거정은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은 1573년(만력 원년)부터 10년 동안 내각의 총책임자로서 황태후 이씨와 어린 황제 신종의 절대적 신임과 환관을 다루는 사례감을 장악한 환관 풍보의 협조 아래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행사하며 엄청난 개혁을 진행했다.

10년 동안의 노력을 통해 장거정의 개혁 조치는 뚜렷한 효과를 보게 되었다. 부패하기 짝이 없던 명나라의 정치도 다소 변화되었고, 나라의 창고에는 10년을 먹고도 남을 양식이 비축되게 되었다. 쓰러져 가는 왕실의 수명을 72년이나 연장시켜 주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에 장거정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온 개혁조치들은 모두 취소되거나 폐지되었다. 내가 언급할려는 교육개혁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학교의 정원을 제한하던 규칙도 없애 각 학교들은 정원을 늘리기에 바빴다.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신종에 의해서이다. 명나라는 급속도로 멸망의 길을 걸어 급기야 1644년(숭정 17년)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나는 장거정평전을 읽으며 장거정의 수많은 개혁들 중 교육개혁이 눈에 들어 왔다.

1575년 4월 장거정은 <정칙학정소>를 올려 학교 개혁을 시도했다. 명대의 학제는 북경과 남경에 국립대학인 국자감을 두고 각 부. 주. 현에는 부학, 주학, 현학을 두어 성의 제학관이 일정한 수의 학생들을 관리했다. 그리고 향촌에는 사학이 있어서 일반인도 자유롭게 입학해 정원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방의 부. 주. 현학에 있었다.

태조는 홍무 연간(1368~1398)동안 부학 40명, 주학 30명, 현학 20명의 학생들에게 매일 식비를 제공해 이들을 늠선생원이라 불렀다. 1382년부터는 관에서 매월 쌀, 생선, 소금 등 생필품을 공급하고, 당사자 외에 집안의 다른 두 젊은이의 요역을 면제해주는 등 혜택의 범위를 점차 늘렸다. 1428년에는 다시 부. 주. 현학의 생원을 늘려 증광생원이라 했으며, 쌀은 주지 않고 요역만 면해주었다. 즉 한 집에 생원이 하나면 세 사람이 요역을 면제받았다. 이후 다시 일종의 특별생으로 요역만 면제해주는 부학생원이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학생 수는 계속 증가했다.

이들은 한나라 때 쓰던 수재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간혹 문장력이 좋고 학문이 뛰어나 과거에 응시해 거인이나 진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평생 부.주.현학 생원으로 눌러 앉아 국가가 주는 혜택만을 누렸다. 이들의 수가 매년 증가하자 서로 연대해 은연중 지방의 특권세력이 되어 백성을 못 살게 굴었고 지방 관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눈만 뜨면 입에 공자, 맹자를 달고 성현과 사서삼경을 인용하며 도덕과 인의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각가지 못된 짓만 골라하는 지방의 커다란 화근이었다. 1574년, 장거정은 각 성의 제학관을 통제하는 것만이 생원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성현들이 좋은 말씀을 남기셨고 국가는 이로써 인재를 양성한다. 만약 경서를 다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학문인데, 다른 가치를 세우고 무리를 모을 필요가 있는가. 이후 제학관들은 교관들과 학생들을 잘 지도해 평소에 경전의 의미를 깨우쳐 실천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국가에 필요한 인제를 만들도록 하라. 별도로 서원을 세워 무리를 만들거나 쓸데없는 공담으로 사회의 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늠선과 증광생원 등 정원 외에 부학 등의 명목으로 학생 수가 많이 늘었다. 이후 관리를 엄격히 해서 행동이 방자하고 황당한 자는 바로 퇴출한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사적인 보복을 일삼는 자는 법대로 처리한다.

- 생원시험을 통해 문장이 서툰자 중 늠선생원이 된지 이미 10년이 지난 자는 부근으로 보내고, 6년 이상 지난 자는 현지에서 채용하도록 하라. 중광생원이 된 지 10년이 넘은 자는 현지에서 채용하되, 6년 동안 상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일반 백성으로 강등한다.

 

명대 초부터 공담을 일삼는 무리들을 타파하기 위해 서원건립을 불허하고, 사람 수를 제한해 학패의 근원을 차단하며 시험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신종 초기에 다시 정비한 것이다. 1579년 전국의 서원을 모두 철폐하고, 학생 정원에는 고성법을 엄격하게 적용해 나갔다. 만약 장거정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고려했다면 학풍을 정돈하는 일은 단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지식층이 있고 이들에게 밉보이면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일로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훼철하였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는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동일한 사람의 서원을 여러 곳에 배향하여 짓는 첩설이 횡행하였고, 결국 면역의 특권을 이용해 군정을 회피하고, 면세의 특권을 이용해 세금을 회피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처음에는 고을의 수령이 서원의 원장이 되어 제사를 주관하였지만 점차 직계 후손들이 그러한 일을 맡아서 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며 붕당을 이루어 당쟁의 근거지로 작용하였다.

1864년(고종 1)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민폐를 줄이는 한편 병인양요로 궁핍한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로 서원 철폐를 단행했다. 당시 유교사상이 짙었던 양반들에게는 정말 큰 타격이었고 반발이 심했다. 서원에 하사한 토지에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서원은 비록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기도 하였다. 이 조처로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는 일은 엄청난 저항을 불러 오는 사건이었고, 지방 유림들의 상소와 시위가 벌어졌으나 서원철폐는 단행되었다. “공자가 살아오더라도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용서치 않겠다”는 흥선대원군의 확고한 신념이 보이는 개혁이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장거정 교육개혁과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장거정의 개혁들 사이에 눈에 들어 온 서원철폐라는 단어는 그나마 낯설지 않은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나 조선이나 서원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설립 당시의 초심을 잃고 점차 특권 세력이 되어 국가가 주는 혜택만을 누리며 백성들에 피해를 주는 일이 심하니 이를 묵과할 수 없다하여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된 목적은 같은 것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사대관계였다.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가면서 조공만 바치고 오는 것이 아니고, 명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가져 왔다. 그로인해 정치, 경제, 학문 등 다양한 방면에 새로운 문물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정거정의 개혁은 조선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각종 사학재단이 벌이는 부정부패는 사회를 좀 먹는 대규모 범죄가 되어가고 있다. 국회에서 사학법을 만들어 국가보조금을 받는 사학재단을 감시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막히고 있다. 그만큼 사학재단의 힘이 강하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최근에 벌어진 사립유치원 비리 사태가 그렇다. 장거정이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를 생각하며 뒤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장거정(張居正)

1525년~1582년, 중국 명나라 때의 정치가로 자는 숙대(淑大)이고, 호는 태악(太岳)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만력제의 신임을 얻어 황제가 즉위한 때부터 10년간 수보의 자리에 앉아 국정의 대부분을 처리하고, 내외적으로 쇠퇴의 조심을 보이던 명나라의 세력을 만회했다.

대외적으로는 육상 무역을 재개해 몽골인의 남침을 막았고, 척계광, 이성량 등을 등용하여 국경을 평화롭게 지켰다. 대내적으로는 대규모의 행정 정비를 단행해 궁전의 낭비를 억제하고, 황하의 대대적인 치수 공사를 완성시켰으며 전국적인 호구 조사와 토지 측량을 단행해 지주의 부정을 막아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