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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의 고대 경기장 터 '히포드럼' & 지하저수조 본문

걸어서 세계속으로/터키

로마시대의 고대 경기장 터 '히포드럼' & 지하저수조

다보등 2012. 5. 30. 11:04

로마시대의 고대 경기장 터 '히포드럼' & 지하저수조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블루 모스크를 빠져 나오니 거리에도 사람들이 넘쳐 나긴 마찬가지이다. 이스탄불은 관광객들이 이스탄불 인구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걸음을 이동하니 눈앞에 불쑥 돌기둥이 서있다. 터키관련 책자에서 많이 보았던 돌기둥이다. 참으로 궁금하였던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되니 내가 터키로 오긴 왔나보다 실감을 하게된다. 흥분된 우리들에게 가이드는 자신의 설명을 듣고 후에 사진 찍을 기회를 충분히 준다고 개인 행동을 자제하게 한다.그래 일단은 가이드의 현장감있는 설명을 들어야 한다. 공부 잘하는 착한 모범생처럼 다들 열심히 귀를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긴 하지만 말이다.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는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에서 가져 온 것이다고. 이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비잔틴 양식의 받침 위에 놓여있고 3,500년 전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상형문자를 해독을 하였다고 하며 뭐라 설명을 하였지만 그때쯤에 집중력이 떨어져 한눈 파느라 제대로 듣질 못했다. 아이들이 어릴적 공부해라 공부해라 수없이 떠들었지만 이 나이가 되니 아이들이 이해가 된다.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아이편이 되었을 것인데....ㅎㅎ

 

 

 

 

 

가장 북쪽에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에 만든 오르메 수툰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벨리스크이다.

10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원래 청동으로 덮여 있었지만 십자군들이 동전을 만들기 위해 가져 가면서 없어지고 받침 또한 히포드롬 광장보다 몇 미터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 받침에는 경마를 관정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푸른색의 철기둥은 셀팬타인 기둥으로 479년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무찌른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뱀 세마리가 서로 뒤엉켜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뱀의 머리 부분과 상단 부분이 파손되어 현재는 뱀의 몸통 부분만 남아 있다고.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은 블루 모스크앞에 있는 길쭉한 터인 '히포드롬'으로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에 의해 지어진 고대 검투 경기장터로 콘스탄티누스 시절에는 검투 경기 대신에 마차 경기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경기장은 10만명 정도 수용 가능한 규모로 만들어졌는데 중앙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 온 기둥이나 조각상 등이 있고 밖으로는 트랙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니카의 난'이 일어나 처형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오스만 시대 때는 예니채리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곳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십자군의 침입 등으로 인해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게 되었다. -엔조이 터키 참조-

 

 

 

 

 

 

 

 

 

 

10만명의 관중들이 마차경기를 볼 수 있었다는 마차경기장은 아무리 상상으로 그려보아도 그려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지하 저수지로 지하궁전이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이동을 한다. 그 가는 길에 히포드롬이 끝나는 지점쯤에 보이는 둥근 지붕을 가진 체슈메는 19세기말에 이스탄불을 두번이나 방문한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선사한 것으로 빌헤름 샘이라고 부른단다.

 

 

 

 

 

살구빛으로 보이는 아야소피아 성당이 길 한켠으로 보인다. 길 중앙에는 전차가 다니는 길이기도 하지만 전차가 다니지 않을 시에는 차도 사람도 함께 다니는 길인듯 하였다.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궁전'

지하이니 당연히 어두울 것이다. 희미하게 조명이 밝혀진 제대로 앞도 안보이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희미한 조명이 비치는 곳에 수많은 기둥들과 바닥에는 물이 언듯언듯 보인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져 있어 다니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조를 둘러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이곳의 물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지하 저수지인 지하궁전은 5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유스티나누스 황제가 증축했다. 물이 귀했던 당시에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초원에서 물을 받아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물을 이곳까지 끌어왔다고 한다. 당시 시민들의 중요한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톤의 물을 저장 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지하저수조에 들어서면 코린트식 기둥 336개가 늘어 서 있는 지하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지하궁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둥에 각기 다른 문양이 있는데 이는 각기 다른 오랜 신전등에서 가져 와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쪽에는 메두사의 머리라고 하는 뱀의 머리를 하고 두눈을 부릅 뜬 얼굴을 볼 수가 있다. 메두사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머리카락이 뱀인 괴물이다. 하나같이 바로 있지않고 비스듬히 누워거나 뒤집힌 모습이다. 이유는 메두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이곳저곳에서 가져 온 기둥들로 사용하다보니 높이가 맞지않아 어쩔 수 없이 비스듬히 세웠다는 두가지 이유가 전해 온다고 한다.

 

 

 

 

지하라서인지 시원함이 느껴지는 지하궁전 내부에는 카페도 있어 과일쥬스나 차이를 마시며 쉬었다 갈 수도 있겠으나 총총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스탄불은 기원전 7세기경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리는 도시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탄불을 비잔티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을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할 때까지 번성한 도시였다. 그리고 당시 유적들이 이스탄불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