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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본문

물길따라 떠나는 여행/관동대로 392km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다보등 2012. 4. 17. 15:37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조선시대 있었던 9개의 간선로중 하나인 관동대로는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여주, 원주, 대관령, 강릉을 거쳐 삼척을 지나 울진의 평해까지 가는 구백이십리 길이고 걷는데 열사흘이 걸린다. 정철의 <관동별곡>이 이 길위에서 씌어 졌으며 율곡이나 신사임당,허균과 허난설헌, 김시습,정철,이색 등 내노라 하는 수많은 선조와 또 유배객이 지나갔던 길 '관동대로'이다. 392km 관동대로 그 길을 걷고자 평해에 도착을 하였다. 이틀동안은 서울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벚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어 우리 눈이 호사를 한 날이기도 하였다. 우선 서울 동대문에서부터 출발을 하지 않고 거꾸로 울진의  평해에서 시작을 하여 동대문으로 걸어 가기로 하였다. '우리땅 걷기' 에서는 9구간으로 나눠서 올 12월까지 걸을 여정인 '관동대로'중 1구간을 4월 둘째주에 시작을 하였다. 유난히 좋았던 날씨에 한몫하여 때늦은 꽃들이 서둘러 피어있던 평해의 아름다운 꽃길로 시작을 한 관동대로였다. 60여명의 도반들이 울진의 평해읍사무소앞에서 '고천제'를 지내는 것으로 천리길 관동대로를 시작을 한 셈이다.

 

 

 

 

 

 

 

평해읍사무소 바로 뒤편에 있는 평해 향교를 들렀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60호이며 고려 공민광때 평해 동쪽 반원산 아래 처음 건립되었다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영조 8년(1732)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중수되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옛길은 9대로였다. 그중 관동대로가 <동국여지비고>제 2권에 서울에서 우리나라 각 지역에 이르던 9대로 중의 제 3로로 기록되어 있다.

 

“서북西北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 1로 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 西水羅津에 가는 것이 제 2로 다. 흥인문興仁門과 水踰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 3로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중랑포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 부산진으로 가는 것이 제 4로 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에 가는 것이 제 5.6로 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5로 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6로 가 된다. 남으로 제주로 가는 것이 제 7로 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縣 수군절도사영에 가는 것이 제 8로 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로 가는 것이 제 9로 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경흥의 서수라로 가는 제 2로와 평해로 가는 제 3만이 이곳 동대문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관동대로 옛길은 거의가 포장된 도로인지라 어찌보면 고달픈 행로가 될 듯도 싶다. 오늘 하루만에 포장된 도로를 30km가 넘게 걸었다한다. 걷는데 익숙치 않은 도반들이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고생들을 하였다. 2009년 처음으로 장기도보기행으로 낙동강을 걸으며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고생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장시간 평지 걷는 일에 익숙치 않던 그때는 툭하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발톱까지 빠지는 고통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나로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들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또한 이틀간을 끝까지 걷는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기도 했다.

 

 

 

 

 

 

월송초등학교교정에 활짝 핀 벚꽃이 있어 탄성이 나왔다. 꽃샘추위가 극에 달한 올 4월은 꽃들의 개화시기까지 늦어 꽃나무마다 봉오리가 움추러들어 언제나 필려나 걱정이었는데 이번에 따뜻한 날이 며칠 지속되더니 이꽃저꽃 한꺼번에 꽃들이 활짝 피었다. 벚꽃이 만발한 초등학교 교정에 잠시 들러 꽃향기에 취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바쁜 걸음을 잠시 늦추었다.

 

 

 

 

 

 

우루루 몰려 가는 우리들이 이상해서 어델 가요? 물어들 보시는 분들이 많다. 평해에서 서울까지 걸어 갈 참이라 하니 무척이나 놀라워한다. 뭐하러 거까지 걸어갈꼬...별꼴이네...

 

 

월송정엘 잠시 들렀다. 관동팔경중의 하나인 월송정은 예전엔 강원도쪽에 속했는데 강원도에만 여러개가 있는지라 울진측에서 우리도 하나달라 해서 월송정이 울진으로 편입을 했다고 한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의 월송정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의 울창한 송림에서 달을 즐기며 선유하였다는 정자이다.명승을 찾는 시인.묵객들이 하나같이 탄복한 곳이라고 한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이미 월송사부근에 창건되었던 것을 조선 중기 연산군 때에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고 하며 오랜 세월에 퇴락한 것을 향인들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한말에 일본군이 철거해 렸다. 1969년 재일교포들이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아서 해체하고 1980년 7월에 현재의 정자로 복원하였으며 현판은 최규하의 휘호로 되어 있다.

 

 

월송정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소나무숲에 가려 뻥뚫린 전망은 아니지만 시원하고 멋진 동해바다 모습이 보인다. 작년에 동해해파랑길을 걸을 때 저 아래 바닷길을 걸었었다. 모래길을 걷는다는게 참으로 어렵고 힘들었던 길이었다. 일년전 일이건만 까마득한 옛일같지 느껴진다.

 

 

 

 오늘 우리가 울진 평해에서 걷기 시작하였다.아래 보이는 파란색 길이 관동대로라고 한다.대체적으로 7번국도를 따라 올라야 한다.

 

 

 

 

 

월송정을 뒤로하고 다시금 포장된 도로를 걸어 울진군 황보리로 들어섰다. 마을어귀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마을 어르신이 아는체를 하며 자신이 15세때 일본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며 할머니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그 당시 어려웠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해주신다. 60년전 그 시절엔 이곳이 얼마나 궁핍했을까 짐작이 간다.

 

 

 

 

 

척산1리 회관을 지나며 국도변에 알록달록 재밌는 집이있어 눈길을 끈다. 크기가 다른 사각형 상자를 기우뚱 이리저리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을 한 집은 최근에 지은 집이라 한다. 마당이 따로 없이 도로변에 세워진걸 보니 아마도 견본으로 지어 놓은거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창으로 보이는 살림살이가 있어 누군가 살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이른 점심을 먹었다. 오전 11시 30분쯤 우리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 식당에서 갈비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점심이라 배가 아직 고프지 않았으나 동선상 이곳에서 먹으면 지나쳐서 다시 이곳으로 오는 수고를 줄일 수 있으니 아마도 그리 하였나보다.

 

 

 

 

 

 

 

 

 

 

 

 

터벅터벅 7번 국도변 망양 휴게소에 도착을 하였다. 제시카언니와 린다는 이열치열이라며 커피를 마시고 나는 시원하게 캔맥주를 마셨다.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땀을 식히고 있자하니 이곳 쥔장아줌마가 가면서 먹으라고 꽁꽁얼린 물을 준다. 얼마나 감사하던지...만면에 화색이 도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잔치국수 한그릇을 말아 내놓는다. 한 젓가락씩이나마 먹고 가란다. 베낭메고 힘겨웁게 걷는 우리가 딱해 보였나보다. 아줌마는 자기 아들도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자신이 남에게 베풀면 돌아서 아들에게 복이 가려니 하는 마음이란다. 참으로 고운 마음을 가진 분이다. 따스한 마음이 들었던 멸치국물이 맛있었던 그 국수를 우리는 행복국수라고 이름지었다.

 

 

 

 

아줌마의 아들이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았다며 출력해 온 글이 식당 한켠에 걸려 있었다. 우리말고도 아줌마의 결고운 마음씨가 다른이에게도 감동으로 전해졌나보다. 보랏빛 아픔에  "다시 들리겠다 홀로 한 약속 지키려 다시 찾은 7번 국도변 울진 망양 휴게소..." 우리도 언젠가 다시 꼭 들르마 약속을 했는데 마음을 다 같은 모양이다. 기분좋은 행복국수를 먹고 다시 길위에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이 날아 갈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