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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본문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ㅡ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로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주인공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담은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제34회 노마문예신인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제64회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유난히 더웠고 비가 많이 내리던 8월을 보내고 다시 여름 같던 9월이 지나는 길목에서 이 책을 읽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부피감에 놀랐고 벅찼다. 아름답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이다. 건축에 대해서 알지 못하여도 읽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단순하게 예쁜 집, 멋진 빌딩을 설계 하고 짓는 것이 건축가 일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사소하게 보이는 손잡이 하나에도 건축가의 철학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분위기에 맞는 해설을 곁들인 음악이 나오고 요리 과정을 자세하게 적어 그대로 보고 요리 하나쯤은 뚝딱 만 들 수 있을 것 같은 음식들과 청춘들의 사랑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런 섬세한 표현이 읽다보면 지루한 면도 있었다. 이주일의 대출 기한을 넘겨 반납연기를 하여 일주일을 더 손에 들고 있었다.
1980년대 평범한 건축학도였던 주인공은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그가 존경하던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에 지원서를 냈다. 몇 년째 신입사원을 뽑지 않은 무라이 설계사무소이다. 입사를 희망하는 오 년, 십 년 경력의 1급 건축사들의 리스트가 별도로 있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신입사원을 뽑지 않다가 뜻밖에 채용이 결정되었다는 기별에 오히려 주인공은 어안이 벙벙하다고 표현했다.
주인공이 입사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에 정식으로 참가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채용되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고 추측을 했다.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은 무라이 설계사무소로서는 십 년 만의 지명 경합 참가였다. 경합 안의 기본 플랜을 확정 짓고, 11월 말의 제출 기한에 맞춰 설계안을 마감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여름 별장에서 합숙을 하며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에서 1등 목표를 위해 여름별장으로 옮겼다. 책에서는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화산인 아스마산의 장엄한 모습과 울창하게 아름다운 여름의 모든 장면들, 직원들의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설계 막바지 선생님이 쓰러지면서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멈추어 버렸고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설 속 정교하게 표현한 국립현대도서관 건물은 설계도면 그대로 실제로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 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10)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기타아오야마 사무소는 반쯤 개점휴업 상태가 되는데 기타아사마에 있는 오래된 별장지, 통칭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이 옮겨가기 때문이다.(11)
(......) 기타아사마 역 광장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기복이 심한 아오쿠리 마을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활엽수 잎이 모두 떨어져 버리는 늦가을에는, 벌거숭이가 된 나무들 너머로 완만한 언덕 위의 무라이 산장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청명한 겨울밤에는 산장의 불빛이 쌓인 눈을 비춰서 인적 없는 아오쿠리 마을의 등대처럼 보였다고 한다....(29)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 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63)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63)
아스카야마 교회에 간 날은 스치는 바람에 건조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맑게 갠 날이었다.(......) 교회는 언덕 중간 정도에 서 있었고, 길에 면한 이층에 현관이 있었다. 이층에서 안으로 들어가 완만한 언덕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간 끝이 예배당이다. 정면에서는 일층분의 부피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뚝 솟은 무덤 같은 고딕양식의 교회 건축과는 정반대로, 몸을 둥글게 말고 낮잠을 자는 회색빛 고양이 같은 모양새다.(70)
선생님의 건축이 늘 그렇듯이 무언으로 사람을 받아들이는 친근한 공기가 떠돌았다.(71)
선생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되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 가 늘 쓰는 사람이 한참 지나서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같으니까. 사람 목소리도 거기 맞춰 작아지지.(81)
매미도 저렇게 큰 소리로 우는 것은 목숨을 걸고 암컷을 부르고 있기 매문이야. 작은 소리로 울면 알아주지 않거든. 이번 도서관 경합은 작은 목소리로 하다가는 질지도 몰라.(81)
계수나무의 황록색 잎사귀는 날이 맑든 흐리든 밝고 경쾌하다. 둥근 모양의 잎사귀를 내려다보면 살짝 부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의 몫의 커피 원두를 핸드밀로 갈면서 유키코 얘기를 듣는 동안에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커피 드리퍼에 넣고 천천히 원을 돌리듯이 끓는 물을 붓는다. 아침 냄새다.(133)
여름 별장을 철수한 9월 중순에는 울창한 숲이 하나의 커다란 초록 덩어리 같았는데, 지금은 노랑, 빨강, 초록으로 나뉘어, 한 그루의 형태와 크기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미 거의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에 대비한 나무도 있었다. 숲 속은 멀리까지 전망이 트이고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줄기랑 가지는 상량식을 올린 가옥의 뼈대 같았다.(327)
상당히 위중한 뇌경색입니다. 연세가 연세이니만큼 낙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은 병원에서 대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359)
나는 '여름 별장' 앞에 서 있다.
이십구 년 전 여름, 나는 처음 여기 왔었다. 가루이자와에 일이 있을 때면 여름 별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가려고 몇 번 생각했지만 실제로 아오쿠리 마을에 와본 것은 두 번뿐이었다.(......)
아오쿠리 마을의 숲은 한층 더 울창해져 있었다. 근처에는 덧문을 닫은 별장이 여러 채 있었다. 덧문 위를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집도 있다. 마당에는 낙엽이 몇 겹으로 쌓이고, 여름에 멋대로 자란 잡초가 자란 그대로 말라 있다. 가을의 쾌창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광선이 나무에 가려져 주변은 어두침침했다.
진입로의 계수나무는 놀랄 만큼 커 있었다. 기억 속의 계수나무보다 훨씬 더 굵고, 높이도 여름 별장의 처마 높이를 훨씬 넘어버렸다. 바뀌지 않은 것은 잎사귀의 모습뿐이었다. 선생님이 쓰러진 날처럼 모든 잎사귀가 위부터 아래까지 남김없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계수나무의 그리운 달콤한 냄새, 나는 잡초와 낙엽으로 뒤덮인 진입로를 걸어가 시기하라 마리코한테 받은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409)
난로에는 언제 누가 태웠는지 까맣게 탄 장작 세 개가 그대도 남아 있었다. 난로 옆 선반에 길어진 오후 햇살을 받아 아가리가 넓은 큰 유리병이 빛나고 있다. 일곱 개나 늘어선 유리병에는 작아져서 못 쓰게 된 연필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라이 설계사무소에서 쓰던 연필이었다. 오른쪽 끝 유리병 제일 위쪽에 내가 쓰던 연필도 섞여 있을 것이다.
"장관이네."
" 이 병은 완전히 잊고 있었군."
" 당신 연필도 내 연필도 이 안에 들어 있어." 옆에 선 유키코가 말했다.(411)
책에서 자주 언급된 계수나무가 우리 동네에도 제법 몇 그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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