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본문

공연,영화,서적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다보등 2023. 3. 11. 08:04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입장권을 1월  중순에 <2월 23일 오전 10시  30분> 표를 간신히 구매를 하였다. 

주말보다 평일 표 구하기가 그나마 수월하지 싶었다.

하루 내내 들락거리며 클릭클릭을 하며 들여다본 끝에 말이다.(누군가 취소한 표)

구입 당시에 전시기간이 3월 1일까지였으니 내가 구입한 표는 전시마감 일주일 정도 남겨둔 날짜였다.

 

오스트리아 국토의 60%가 알프스 산맥에 속해 있고, 도나우 강을 상징으로 하는 산의 나라, 강의 나라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동쪽의 경계'라는 의미로, 중세 이후 19세기까지 유럽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서양고전음악의 중심지로,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 등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독일 출신인 베토벤과 브람스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언어철학의 창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베크 등 학문적 대가들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빈 대학교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오스트리아를 이끈 왕실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며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군림했다. 

몇년 전에 동유럽 패키지 여행에 포함된 오스트리아를 갔다 오긴 했지만 한 자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를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티켓 구매에 성공했다~~^^

 

 

2월 23일 오전 10시쯤 이촌역에서 내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며 긴 줄에 놀랐다. 당일 현장판매(인터넷 예매 후 남은 표)를 구입하기 위해 오픈 전부터 줄이 길다더니 참말 그랬다. 내가 보러 간 날 이미 전시는 2023년 3월 15일까지 2주간 연장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 2주 연장된 표 역시 매진이라고 한다. 대단한 인기다.

 

 

오전 10시 30분 입장을 기다리며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했다.

스마트폰에서 기계없이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는데, 이어폰을 가져가지 않아서 오디오 가이드 기계를 대여했다.

대여비 3,000원.

 

 

 

남다른 외교 전략으로 유럽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가문을 이어나간 합스부르크 왕가.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기도 하다. 약 600여 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스페인, 동유럽, 독일 등에서 큰 활약을 이어나갔다.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

예술, 문화, 건축 등 모든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0세기 스위스 북부 지역의 백작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3년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동쪽 영역'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출한다.

신성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을 잇는 후예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력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더 멀리'라는 좌우명을 가진 가문답게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후 점점 세력을 넓힌다. 마침내 16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렵 대부분의 지역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이룬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전투 때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다. 갑옷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행사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한 마상 시합이었다.

마상 시합의 형식에 따라 특화된 갑옷이 필요해 주로 부품을 조립식으로 제작했다. 부품 수가 많을수록 비싸고 기능이 다양한 갑옷으로 여겼다. 단순히 전투를 위한 목적만이 아니 시대의 패션으로서 유행에 따라 갑옷의 형태도 달라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적인 수집품이다.

 

 

루돌프 2세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군주를 통해 가장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루돌프 2세 치세에 구교과 신교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또 13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튀르크 전쟁에서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무능한 황제라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자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 박물관 공예관의 모태가 될 정도로 그의 예술가적 심미안은 높게 평가된다.

 

조가비 모양 그릇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의 공주를 보고 싶어 하던 페르디난트 3세를 위해 디에고 벨라스케스 특유의 화법으로 그린 초상화이다. 

공주는 훗날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20살쯤에 요절했다.

 

 

17세기 오스만투르크와의 갈등을 해결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근친혼을 거듭하며 헝가리, 보헤미라, 크로아티아 등을 확보 동유럽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기네들의 세력을 혼인 동맹으로 늘렸는데 그렇게 근친혼이 이어지다 보니까 유전병이 발현해서 자손들이 요절했다. 일명 '합스부르크 턱'이라 부르는 주걱턱이 한 예이다.

 

동방박사의 경배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한다.

세 군주국의 위엄은 탁자 위에 올려둔 왕관으로 드러난다.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보헤미아의 성 바흘라프 왕관,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차례로 놓여 있다. 여성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녀는 16명의 왕자와 공주를 낳아 전 유럽으로 결혼시켜 동맹관계를 구축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리 앙트와네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막내딸 마리 앙투와네트 그림 앞에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중앙 의자에 잠시 앉아 두 명의 모녀를 감상할 수도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막내딸로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혁명광장(현재 콩코르드 광장)에 단두대가 설치되고, 마리 앙투와네트는 루이 16세와 함께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기적의 물고기 잡이 등 사도바울이 선교여행 중 아테네에 머물었던 일화를 묘사한 것과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베드로, 안드레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테피스트리로 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장식품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물품이었다. 엄청 거대한 작품으로 벽면에 아주 크게 전시되어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엘리자베트 황후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이다. 허리 19인치의 아름다운 시시의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푸른빛 드레스가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 엄격한 황실은 감옥과 같았다. 오스트리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여행 도중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전시장 마지막에 갑자기 조선 갑옷과 투구가 전시되어 있어 놀랐다.

조선 국왕인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투구와 갑옷(조선 1890-94년경)

 

1892년 조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과 수교하면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로 조선의 투구와 갑옷을 보냈다. 고종이 직접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투구와 갑옷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거쳐 현대에 이르는 600년의 긴 시간동안 합스부르크가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술품 수집에 열정을 쏟았고, 뛰어난 수집가이자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리적 힘보다 문화와 예술 역량이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합스부르크의 유산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감상하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켜낸 예술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