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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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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다보등 2024. 5. 23. 23:1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다뤄 새로운 여성문학, 여성주의의 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고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이 다섯 개이고 기사에 악플이 줄줄 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공지영.

 

'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실이에요. 정말이지 행복하고 만족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당신들이 지금 무엇을 떠올리는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니까요.'

세상은 여전히 나를 상처입히고 싶어 했으므로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인기와 함께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작가는 섬진강 눈부신 윤슬이 내려다보이는 15평 남짓의 집에서 지내며 그 안에서 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찾은 평온과 행복을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은 또 섬진강 쪽으로 고민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지인들과 나눈 여러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날마다 점점 행복해지기로 했다'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 공지영의 섬진 산책이다.

 

 

 

 

책 속의 내용 중 지극히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문장들을 이곳에 옮겼다..

 

새 아침은 마치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흰 눈 쌓인 벌판처럼, 혹은 흰 백사장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내게 다시 주어진다. 나는 그것이 내게 주어지기 위해 아무것도 애쓴 것이 없으니 이것은 온전한 선물이다. 현재, present, 선물이라고 번역되는 그 단어, 오늘.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

기억해두기 바란다, 이 세 단어를.

 

세상에는 장미도 있고 채송화도 있다. 백합과 모란도 있다. 벚꽃과 소나무,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다리가 긴 사슴과 다리가 짧은 웰시코기 강아지가 있다. 어느 것이 아름다운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으로 아름다울 뿐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적어내라고 하면 고민 끝에 ' 나 자신'이라고 쓴 사람과 '나의 자존심'이라고 쓴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은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을 아는가?

내 자존심이 가장 중요하다면 어떤 순간 나는 내 자존심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거고, 우리는 어쩌면 이 회로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존심을 가끔은 내려놓기도 한다. 수많은 위인들이 역경 속에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지켜왔다.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품격을 지켜야 한다.

 

오후가 되면 우리 집 앞 섬진강에는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윤슬들이 고인다. 윤슬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물을 볼 때 반짝! 하고 빛나는 그 구슬 같은 알갱이 그것의 순우리말이다. 내가 하루 종일 강가에 앉아 있노라면 햇살의 변화와 함께 윤슬들이 몰려든다. 우리 집은 서향을 향해 있어서 오후가 되면 상류로부터 흘러내린 윤슬들이 재잘거린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아주 나이가 들어 나는 알게 되었어요. 사람의 단점은 없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의외로 쉬워요. 방법은 이거야. 장점을 자꾸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그 장점이 점점 더 커져 단점은 분명 있기는 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방법이야."

 

나는 녹차잎들을 비벼 형체가 없어지도록 으깨면서 된장을 생각했다. 차가 본래의 맛을 내기 위해서, 콩이 된장이 되기 위해 우리는 가끔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의 형상들을 잃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발효차는 비닐을, 콩은 곰팡이를 뒤집어쓰고 일정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쩌면 고통뿐인 듯 느껴지는 그 시간들을 잊지 마시기를. 나비가 되기 위해 벌레는 자신의 몸을 마비시켜 번데기가 되어야 했고 꽃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추락을 맞아야 했다는 것을. 

 

늙어감이 공평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때야 인간의 내면이 밖으로 배여 나오기 때문이리라.

최소한 50 혹은 60 이후의 얼굴은 성형이 아니라 내면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내면이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름다운 노년을 맞고 싶다면 그러므로 내면을 가꾸어야 한다. 50이 넘은 사람은 진심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는 거다.

 

산다는 게 말이야. 중간이 없어, 성장하느냐, 아니면 늙어버리느냐야.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늙어가는 거야.

 

나는 안다. 사실 이 세 명의 후배들에게 해준 말은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누군가 나를 절벽으로 밀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내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은 기필코 우리를 절벽으로 민다. 그때 우리는 선택할 것이다. 추락할 것인지 날아오를 것인지를.

 

사랑하는 내 친구들 부디 행복하길, 부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