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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영국을 걷다/ 이영철 지음 본문

공연,영화,서적

영국을 걷다/ 이영철 지음

다보등 2024. 4. 20. 17:54

15박 16일, 315킬로미터, 폭풍의 언덕을 지나 북해까지.
작가 이영철은 오래 다녔던 직장에서 퇴직하자마자 배낭 하나 둘러매고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사는 것이 바빠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던 꿈, '세계 10대 트레일'을 완주하고 싶다는 소망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퇴직 후 5년 만에 영국 '코스트 투 코스트'를 비롯해 10대 트레일을 모두 완주했다고 한다. 


 
 
섬나라 영국은 지형적으로 우리 한반도와 닮았다. 반도에는 견고한 휴전선이 남북을 가르고, 섬의 허리에는 고대 성벽의 흔적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구분 짓는다. 스코틀랜드 바로 아래쪽인 잉글랜드 북부 지방을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횡단하는 총거리 315킬로미터 도보여행길을 가리켜 '코스트 투 코스트 (Coast to coast Walk CTC)'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인천 월미도에서 강릉 정동진이나 묵호항까지 가는 정도의 거리다.
 

 
 
CTC는 영국의 여행 작가 앨프리드 웨인라이트가 개척하여 1973년 처음 세상에 알린 길이다.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장거리 트레일로 유럽인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나라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코스트 투 코스트 주요 경로

 
CTC 트레킹을 떠나기에는 무어 들판에 헤더꽃이 만발하는 8-9월이 가장 좋다. 영국에는 우리나라의 장마철처럼 특별한 우기철은 없다. 다만 비가 자주 내린다. 15일 걷는 동안 사흘에 한 번 꼴로 비를 만났다. 우산과 우비, 목이 긴 방수 등산화는 필수다.
 

 
 
이 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영국 정부가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한 세 개의 국립공원을 연이어 관통한다는 것이다. 잉글랜드 서부의 '레이크 디스트릭스'와 중부의 '요크셔 데일스' 그리고 동부의 '노스요크 무어스'가 그것이다. 이들 세 국립공원의 면적을 합치면 우리의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세 개의 국립공원을 합친 면적의 여섯 배가 넘는다. CTC가 얼마나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이 길은 드넓게 펼쳐진 진초록의 대자연이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곳이다. 또한 CTC가 관통하는 광활한 요크셔 지방은 세계적인 명작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의 배경이 된 장소이자, 저자인 에밀리 브론테와 샬롯 브론테 자매들이 불운한 삶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길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야생화 헤더와 황무지 무어랜드의 서사적 정경들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비극적 사랑을 절로 떠올리게 할 것이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황야를 말 달리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두 남녀의 모습은 '폭풍의 모습'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였다.
 
" 아, 저 바람을 쐬어야겠어. 무어에서 불어오고 있어. 저 바람을 맞으며 언덕 위 헤더 속으로 뛰어들면 나는 꼭 다시 살아날 거야. 창문을 활짝 열어줘."
 
죽음을 앞둔 케서린이 그렇게 갈망했던 그 황야의 바람은, 요 며칠의 나에겐 일상이 되었다.
 
 

헤더꽃이 만발한 노스요크무어스 국립공원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언덕을 오르고 오르던 어느 순간, 눈 아래 낙원이 펼쳐진다. 아담과 이브가 누볐을 에덴동산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야트막한 구릉과 능선이 겹겹이 반복되고, 중간 중간 기다란 돌담들이 엄격한 경계를 만들고 있다. 드넓은 초원은 보라색 물결로 넘쳐나는 중이다. 찬란한 경관이다. 황무지, 무어랜드의 헤더꽃 물결.../204
 

 
 
"우리는 길을 밟지 않고는 세상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밟아본 적 없는 새로운 길 앞에 섰다." (p35)
 
언젠가 헤더꽃 만발한 그 길을 걷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덮었다.
천천히 깊게 들여다보는 그런 느린 걸음으로 걷고 싶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걷기에 관련된 이런 류의 책은 읽는 내내 설레고 행복하다.
걷지 않으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길이 주는 결이 있다.
책속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걷는다.
상상으로도 길에 대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거친 길을 걷는 고됨도 같이 느끼게 되고 함께 웃기도 눈물 짓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