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초보 노인입니다/김순옥 에세이 본문
이 책은 유명 작가가 쓴 책이 아니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당선책이다. <나는 실버아파트에 삽니다>라는 글을 바탕으로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저자와 남편이 실버 아파트에서 겪게 되는 일 그리고 관찰한 일들이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따뜻하고 정감 어린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양한 노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책이다.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은퇴를 하고 30년간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경기도 일대 전원주택을 계약하고 이사했으나 주택 뒤쪽 옹벽이 배를 쑥 내밀고 있어서 약한 비바람에도 불안했다. 결국 6개월만에 주택을 떠나 신축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전세로 사는 상황이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전원주택을 찾던 솜씨로 다시 네이버 부동산을 이잡듯이 뒤졌다. 남편이 전원주택을 대놓고 싫어하는 바람에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어서 이번에는 아파트를 뒤졌다. 그렇게 구한 곳이 실버아파트였다. 원해서가 아니라 돈에 맞추다 보니 이곳이었다.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새 아파트라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실버고 무엇이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주 자격이 오로지 나이 제한만 있었는데 내가 60이 넘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문제는 정작 내가 실버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아직 밖에서는 할머니로 불린 적이 없었고 실제로 손주도 없었다. 동안이라 50대라는 말도 듣곤 했다.
일반 아파트와 별 차이없이 도리어 더 세심하게 지어졌고, 어차피 아파트 생활이란 게 공간에서의 개인적인 삶인데 뭐가 문제일까라는 생각은 실버아파트에 대한 나의 몰지각이며 실례였다.
실버아파트는 다른 세계였다. 실버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산다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노인들에게 최적화된 장소이지만 이제 막 60대가 된 나에게 실버아파트는 낯선 세계였다.
이곳에서 매일 만나는 실버아파트의 노인들은 나의 미래였다.
노인들은 느리고 고상하고 편안했다. 이들을 이웃으로 만난 것은 내게 커다란 인생 공부였다.
그러나 갈수록 나의 실버아파트 진입은 너무 빨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직 노인이 될 준비가 안 된 나에게 이곳에서 실버로 사는 것은 관찰자로 머무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결국 2년 8개월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아파트니까 재산세도 내고 주민세도 내고 건강 보험료도 낸다. 당연히 등기권리증도 가지고 있고 주택 연금 신청도 가능하다. 다달이 우편함 고지서에 관리비 청구서가 꽂혀있고 조금이라도 인상되었으면 욕을 하면서도 계좌 이체를 한다.
단지별로 멋진 식당에는 1년 내내 세끼 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원하는 메뉴를 보고 가서 먹으면 된다. 물론 유료이기 때문에 맛이나 가성비가 좋다 나쁘다 하는 개인적인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식당에서는 일주일간의 세끼 식단을 짜서 매주 입주민들에게 제공했다.우리나라 가정식의 큰 틀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었고 가끔 서양식이나 중식이 제공되는 정도였다.
전통입맛에 가까운 남편은 매 끼니 따뜻한 밥과 국, 누룽지를 만들어 주는 식당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입맛 없는 노인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기본 영양 식단이 제공되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향기는 어느 세상과 비슷하나 한없이 조용하고 담담한 곳. 왈칵 울음을 터뜨릴 만큼 서러운 일도, 울화통을 건드릴만큼 화나는 일도, 이치를 따져 가며 목청을 높일 일도, 견딜 수 없이 기쁘거나 슬픈 일도 모두 숙성되는 이곳.
늙는다는 게 이런 건가? 그러나 단순히 늙음이 답은 아니었다.실버아파트에서 만난, 기도서 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각각 다른 방식이었으나 남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결국에는 사랑하는 마음마저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곳엔 천사들이 꽤 입주해 있는 모양이다. /114
떠나고 싶었으나 여전히 실버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나는 이곳에서 세 번째 가을을 맞았다./115
자세가 상당히 곧고 옅은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는 8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할머니의 손톱을 보니 손톱마다 고운 색깔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할머니에게서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 은은하게 났다 무슨 섬유 유연제를 쓰시나 궁금했지만 내가 묻기 전에 할머니는 먼저 시작했다.
"지금이 제일 고울 때야. 젊은 사람이 멋 좀 내고 다녀요. 이렇게 이쁠 때는 금방 지나가거든. 알았죠?"
나의 현재를 예쁘고 젊다고 봐 준 노인들은 분명히 나의 시간을 지나간 분들이다. 그분들이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늙음을 앞당기지 말라는 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사인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예쁘게 꾸미고 식당 앞에서 고운 할머니를 기다려 봐야 할 모양이다. / 125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죽음을 기뻐할 것까진 아니어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과 나름 계획까지 세워 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를 죽게 하라'고도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게 죽음인 것은 알지만. 하여간. /163
삶이란 다 제 각각이니까.
우리는 모두 은퇴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대개는 한두 가지의 질병에 시달리고, 간간이 찾아오는 우울과 불면에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직장을 은퇴하고 아이들이 독립한 후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가끔씩 절망하기도 하다가 또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하염없이 뒤쫓는 친구가 있고, 맥 놓고 있다가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친구도 있으며 나처럼 하루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노는 친구도 있다. 어떤 선택도 각자의 몫이기에 우리는 기탄없이 떠들다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는 각각 자신의 재능대로, 자신의 기질대로 열심히 삶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어떻게 견디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놀든 일하든 배우든 실패하든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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