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3, 랑겔한스섬의 오후 본문
랑겔한스섬의 오후
옛날 이야기.
중학교 들어가던 봄, 생물 첫 수 업 시간에 교과서를 잊고 안 가져와 집에까지 가지러 돌아간 일이 있다.
우리 집은 그때 학교에서 걸으면 십오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냅다 뛰어서 왕복하면 수업에는 거의 지장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아주 순진한 학생이어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대로 열심히 뛰어 집으로 가서는 교과서를 들고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마시고서는, 다시 학교를 향해서 뛰었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강이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리 깊지도 않고, 깨끗한 물이 졸졸졸 흐르는, 그리고 거기에 낡은 다리가 걸려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다리였다. 그 주변은 공원이고, 협죽도가 눈가리개처럼 줄지어 피어 있었다. 다리 한 가운데 서서 난간에 기대어 남쪽 방향을 바라보았더니,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하도 눈이 부셔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따끈따끈한'이란 형용사가 딱 어울린다. 마치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져 버릴 것 같이 기분 좋은 봄날 오후였다.
사방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지표에서 이삼 센티미터쯤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느 한숨을 돌리며 땀을 닦은 다음, 강변의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힘껏 달렸잖아, 잠시 쉬어도 괜찮겠지 하면서 말이다.
머리 위로는 흰 구름이 꼼짝않고 한 군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눈 앞에 손가락을 세워 재어 보니, 조금씩 조금씩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 밑에 밴 생물 교고가서에서도 역시 봄 냄새가 났다.
개구리의 시신경과 저 신비스런 랑겔한스섬에서도 봄 내음이 풍겼다. 눈을 감으니 부드러운 모래톱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강물 소리가 들렀다. 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질 듯 무르익은 사 월의 오후에, 또다시 생물 수업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61년 봄의 따스한 어둠 속에서,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랑겔한스섬의 물가를 더듬었다.
♧ 랑겔한스섬 : 췌장에 있는 내분비세포, 췌장 전체에 섬 모양으로 산재
소확행
.....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속옷이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小) 하지만 확(確)고한 행(幸)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 체계인지도 모르겠다.
........
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그 기분이란 역시 소확행의 하나이다...
♣ 소확행이란 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랑겔한스섬의 오후'편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랑겔한스섬이 낭만적인 섬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 날이다. ^^;;
'공연,영화,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윗 프랑세즈>이렌 네미로프스키 책 & 영화 (0) | 2022.07.24 |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0) | 2022.07.18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0) | 2022.07.07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지음 (0) | 2022.06.30 |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석가모니 고행상 (0) | 2022.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