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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 부발역 ~ 세종대왕릉역 본문

경기 옛길

경기옛길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 부발역 ~ 세종대왕릉역

다보등 2024. 4. 28. 20:11

3월 30일
지난 주에 봉화길 5길을 걸었고 이어 봉화길 6길을 걷기로 한 날이다.(걸은 지 오래인데 정리하다가 뒤로 밀려서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다.) 부발역까지는 지난 번에 이용한 곳이라 능숙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양재역에서 신분당선을 타고 판교역에서 경강선으로 환승하여 부발역에서 내리니 1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환승도 무난하였고 나중에 알고보니 이 날 경강선 성남역이 개통한 날이더라. 
 

 

 

다시 찾아온 부발역 광장의 조형물

오전 10시 10분에 만나 인원 점검을 하고 출발을 하였다.

오늘은 20명의 회원들과 함께 걷는다.

대부분 둘레길을 남편과 둘이서 걷다가 봉화길을 카페 회원들과 같이 걸으니 길 찾는 애로사항도 없이 수월하게 걷는다.

 

 
 
부발역 왼편으로 굴다리를 지나 가면서 6길 골내근길 시작이다.
이 길은 5길을 걸을 때 종점인 부발역으로 들어서던 길이기도 하다.
 

 
 
봉화길 제6길 골내근길 : 부발역 - 수정리마을회관 -새종대왕릉역 (14km)
협궤열차, 수려선(수원-여주)의 옛 흔적을 찾는 길
골내근은 고구려때 불렸던 여주의 최초 지명이다. 이 일대는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 짓기에 최적의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1930년부터 1972년까지 수원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는 수려선 협궤열차가 지나갔다. ㅇ리제강점기 시기에는 이천과 여주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청항까지 운송하기 위해서였고, 해방 이후에는 도민의 사연을 가득 담은 이동수단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협궤열차의 흔적을 상상하여 걷는 길이기도 하다.
 
 

봉화길 안내도, 골내근길과 자체방앗길 안내도
말냉이

 

 
 
마을 끝에 보이는 건물이 수정리마을회관이다.
그곳에 6길 골내근길 스탬프함이 있는 곳이라 인증 도장도 찍고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날씨가 좋았다. 오히려 더울 지경이었다.
 

 
 
여주의 최초 지명, 골내근현
기록으로 전해지는 여주의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에 골내근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황효, 고려 태조(940) 때 황려, 성종(955) 때 황리, 고종(1275) 때 영의, 충렬왕(1305) 때 여흥, 무왕(1388) 때 다시 황려, 공양왕(1389) 때 여흥 등으로 바뀌어 왔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1401) 때 원경왕후의 내향이라 하여 여흥부로 승격시켰고, 세종대왕릉을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서 여주로 옮기면서 1459년 8월 8일 천령현을 여흥부를 합하여 여흥목으로 승격시키고 이어 8월 18일(양력 9월 23일) 여흥을 여주로 바뀌게 되었다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여주 지명 '골내근'에 관한 몇가지 설
1)신륵사 용마 설화와 관련하여 '굴레끈'을 한문으로 적은 것이 골내근이다.
2)여강이 골짜기 안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하여 골짜기를 뜻하는 '골'과 흐르는 물을 뜻하는 '내'를 조합하여 골내근이 되었다.
 

 
 
3) '골'은 우리말로 누런색을 가리킨다. 여강은 여름 홍수 때 누런 황톳물이 흐른다. '내'는 하천을 뜻하는 川을 의미하고, '근'은 고을 村을 의미한다. 이를 종합하며 골내근은 누런 내가 흐르는 고을이 된다.
 

 
 
4) 골내근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황효(黃驍), 고려 태조(940) 때 황려(黃驢), 성종(955) 때 황리(黃利)로 이름이 바뀐다.
고려말 공골(公骨)말은 털빛이 누런 말(黃馬)을 가리키며, 가라말은 검은 말(驪馬)을 가리킨다.
그리고 효(驍)와 리(利)에는 '날쌔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신라 신문왕 때 지방 군사조직인 10정은 기병부대였다.
그 10정 중에 골내근정이 여주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주의 지명이 말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처 '가까이서 본 여강의 역사)
 

 
 
가도가도 그늘 한 점 없는 둑방길이다.
지금 이 계절에 걸으니 망정이지 조금 더 늦게 걸었더라면 고생길이겠다.
 

 
 
용은교를 건너며 길 형편이 좀 나아지려나 하였으나 길은 여전히 그늘 한 점없는 직선 하천둑을 걷고 걸었다.
 

 
 
갈수기인 지금은 아래 보이는 저곳으로 건너야 했다. 
한참을 걸어서 상류쪽 다리를 건너 유턴하여 다시 반대편 이곳을 지나게 되더라. 그 거리가 꽤나 길게 느껴졌다.
 

 
 
이 일대가 세종대왕면이다.
면소재지 이름이 거창하다며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다리를 건너 반대편 둑을 걸어 내려간다. 그러니 좀 전에 보았던 그곳으로 건널 걸 그랬다며 아쉬워 했다는...ㅋ
종일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다보니 온갖 꾀를 부릴 궁리만 하게 된다.
 

 
 
다리를 건너 하염없이 걷고 걷는다.
함께 걷는 일행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 의지가 된다. 많이.
 

 

 
 
위 사진은 지나온 길
아래는 진행방향.
마치 활주로 느낌이다. 
와~ 이런 길은 정말 둘레길이니 이래 걷고 있지 일부러 걸을 일은 절대 없는 그런 길이다.
그 흔한 정자도 하나 없다.
 

 
 
유일하게 그늘이 있던 길이다.
방품림일까?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무척이나 운치가 있는 모습이다.
 

살벌한 가시가 있는 엄나무

 
그늘이 주는 고마움을 다시 느끼며 잠시 쉬었다 간다.
양말도 벗고 다리 쭉 뻗는 이들도 있다. 
졸고 있는 듯한 마을 뒤쪽으로 경강선 전철이 휙 지나간다. 
참 그림같은 풍경이다.
 

봄나물을 뜯고 있는 마을 주민
왼쪽에 신지2리 마을회관, 신지2리 경로당

 
마을회관 앞 정자에 태평정(太平亭)이라 적혀있다.
 

 
 
마을회관에서 보면 저 멀리 세종대왕릉역이 보인다.
역이 보이기 시작하자 진정 반가웠다.
 

 
 
일행들은 중간에 내려서 식사를 한다는데 남편과 나는 패스~
우리 동네에서 개성만두전골로 오붓하게 마무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