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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고려왕릉 본문
남한의 고려왕릉은 모두 6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예상되는 조선시대의 왕릉보다 더 이전의 왕릉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현재 휴전선 남쪽에서 피장자의
왕명(王名)이 문화재의 공식명칭에 붙여진 무덤은 모두 48기다, 이중 백제가 1기, 신라가 38기, 가야가 3기, 고려가 6기다.
고려왕릉 6기 중 4기는 대몽 항쟁기 수도였던 강화도에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각각 2기씩이다. 고려 23대 고종의 홍릉,21대 희종의 석릉,
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의 곤릉, 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의 가릉이다.홍릉말고는 모두 1992년에야 사적으로 지정된 이 무덤들은 이후 나름
대로 정비와 보수를 거쳤지만 여전히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곤릉은 표지판이 부실해 사격장이나 논두렁으로 잘못 들어서기 쉽고 무덤 주변에
있던 석인과 석수들은 사라진 상태다. 석릉은 인적 드문 산길을 350m가량 걸어가야 찾아갈 수 있다. 진강산 등산로에 있는 가릉만이 비교적
정비된 진입로를 갖췄다.-출처 조선일보 -
철종외가를 둘러 보고 '국일관'에서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고려왕릉을 답사하기 위해 이동을 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이다. 문화재답사할 때는 비가 오는게 제격이라며 다들 긍정적인 반응들이다. 그렇지 그래야 석물들의
조각이 선명하게 드러나보이니까....뭐...^^*
곤릉 <坤陵> 사적 제371호
고려 강종(1211~1213,재위)의 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이다.
왕비 원덕태후는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이 능의 봉분과 석축의 곡장은
붕괴되고 각종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이었던 것을 1974년 정화하였다.
석릉 <碩陵> 사적 제369호
고려 21대 왕인 희종(재위기간 1204~1211)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7년 (1211)에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고종 24년(1237) 8월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능은 지름 8m의 원형 봉분과 주위에 'ㄷ'자형의 석축으로 낮게 둘러싸여 있으며, 묘비 1개와 문인석 2구가 있다.
2002년 발굴조사를 통해 청자상감국화문잔탁 등 12-13세기 상감청자 전성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
고려 24대 원종(1259~1274)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 31년(1244)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문인석의 몽골식 모자가 이채롭다.
가릉 뒤편의 이름없는 릉으로 가는 길엔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화능내리석실분(江華陵內里石室墳) - 인천시 기념물 제28호
이 석실분은 강화 진강산 남쪽에 있는 고려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이 있다.
무덤은 지하에 석실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봉분과 그 바깥쪽에 난간석과 석수를 배치하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곡장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석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축조연대는 강화 천도시기(1232~1270)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2008년 정화하였다.
허유전 묘(許有全 墓) 인천시 지방기념물 제26호
고려시대 명신이었던 허유전공의 묘이다.선생은 고려고종 30년(1243)에 출생하여 원종 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관직을 거쳐
충렬왕 24년(1298)에 전라도 안렴사, 뒤이어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그후 선생은 충숙왕
원년(1314)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 호를 받았으며 충슉왕 8년(1321) 수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1988년 6월 한국선사문화연규소 주관 아래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고려의 묘제 연구뿐 아니라 고려 청자잔, 토기병,송,금의 엽전 등
고려시대 관계 유물이 여러점 출토되어 고려시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쌍어가 있는 문양이 눈에 띈다.
김수로왕의 가야유물에 쌍어문이 있다.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유화상이 세웠다는 은하사에도 두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후손들에 의해 섬세하게 관리되고 있는 허유전의 묘는 참 정갈하다.
◆신라·가야·백제 왕릉은…
경주에는 대규모 고분이 많다. 신라 1대 임금 혁거세거서간(박혁거세)과 왕비 알영 등의 오릉(五陵·사적 172호)부터 55대 경애왕의 능(222호)까지
신라 왕 36명과 왕비 1명의 무덤이 경주에 있고, 마지막 56대 경순왕의 능(244호)은 경기 연천에 있다. 경순왕은 고려에서 '왕의 시신은 도성 10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해 연천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주의 왕릉 중에서도 특히 선덕여왕릉(27대), 무열왕릉(29대), 문무왕릉(30대), 성덕왕릉(33대), 헌덕왕릉(41대), 흥덕왕릉(42대), 원성왕릉(괘릉·38대)
등은 학계에서 피장자가 확실한 무덤으로 꼽는다.
해마다 대가야(大伽倻)를 테마로 한 축제가 열리는 경북 고령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이 즐비한 지산동 고분군이 있다.
그러나 피장자가 알려진 가야의 고분은 경남 김해의 수로왕릉(사적 73호)과 수로왕비릉(74호), 산청의 구형왕릉(214호) 정도다.
백제의 고분 중에서는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이 피장자가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25대 무령왕의 이름인 '사마왕(斯麻王)'이라는 글자가 적힌 석판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던 것이다.
◆고대 왕릉도 세계유산이 될 수 있나?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이유에 대해 ▲500년 한 왕조의 왕릉이 완벽하게 남아 있고 ▲제례(祭禮)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인의 세계관을 압축했고 ▲의궤 등 풍부한 역사적 기록이 많다는 점을 들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중시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청장은 "그 전 시대의 왕릉들도 훌륭하지만 이 네 가지 측면에서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고분 전문가는 "조선왕릉의 뿌리는 고려왕릉에 있고, 고려왕릉은 신라왕릉을 계승한 것"이라며 "신라와 고려왕릉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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