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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종묘,창경궁(2) 본문

서울문화유산답사

역사탐방 종묘,창경궁(2)

다보등 2009. 3. 5. 18:41

2009년 2월 25일 (수) 오후 3시~

두번째 : 창경궁

 

창경궁의 역사 :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년)에 세운 이궁으로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창경궁 자리는 원래

수강궁이 있던 자리였다. 수강궁은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부왕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다. 당시 세종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바로 옆에

부왕이 머무는 수강궁을 지었던 것이다.그러나 태종이 죽자 수강궁은 비게 되었고 세종도 경복궁으로 이어함으로써 수강궁은 쓰임새를 잃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단종이 수강궁에 머물렀고 세조가 수강궁에서 승하했다고 한다. 그후 성종이 세조 비인 정희왕후와 예종 비인 안순왕후 그리고 덕종 비인

소혜왕후, 이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다시 고쳐 지으며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등을 세우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명정전등 정전을

갖춘 궁이지만 실제로 임금의 집무와 생활을 위한 궁이라기 보다는 대비들을 위한 별궁의 의미가 큰 궁이라 할 수 있다. 또 조선의 궁 중 유일하게 동향을

하고 있는 궁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때인 순종 3년(1909년)일본인들이 창경궁의 건물을 헐고 이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4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정전>국보 제 226호

성종 15년(1484년) 처음 세웠고 임진왜란 때인 1592년과 순조 30년(1830녀)에 불에 탔으나 순조 34년(1834년)에 중건 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이 보수를 거치며 현재까지 남아 있어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정전이 바로 명정전이다.

 

 

 

 

 조정과 품계석

궁의 정전 앞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한다. 조정은 얇고 넓은 박석을 깔아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방화수통 무쇠솥 드므......드므에는 물을 채워 놓는데 불귀신인 화마가 찾아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신의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옛날 궁궐에서 가장 무서웠던건 화재였으니....

불이 났을때 이 드므에 담긴 물이 방화수 역활도 했을 것이다.

 <문정전>임금이 평소에 집무실로 사용하던 편전에 해당 하는 건물이다.

 

 

 <숭문당>순조때 소실되었던 것을 바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의 현판인 崇文堂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라 한다.

영조는 이 숭문당에서 성균관의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빈양문(賓陽門)

 숭문당을 지나 뒤편  왕의 업무 공간인 외전과 왕실의 생활 공간이 내전을 연걸하는 빈양문으로 들어 선다.

 

 <함인정> 빈양문을 나서면 함인정이 나온다. 이 함인정은 영조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 자리에는 인양전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뒤 인조 11년(1633년)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와 함인정이라 이름 붙였다.

 

 <주목>

 

 <환경전>왕,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중종과 소현세자 그리고 익종(효명세자)가

이 환경전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죽었을 때는 익종의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춘전>왕비나 세자빈이 머물던 건물로 이곳에서 정조와 헌종이 태어 났다고 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건물이기도 하다.

'慶春殿 ' 현판은 순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통명전>창경궁의 내전 건물 줄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주로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쓰였다.

건물 서쪽으로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뒤로 화계를 꾸며 왕비를 위한 공간을 꾸몄다. 내전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양화당>통명전 동쪽에 있는 건물로 통명전보다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통명전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의 중요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던 인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이곳 양화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창덕궁이 파손되어 어쩔 수 없이 임금이 이곳 양화당에 머물렀던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격하 되었을 때는 창경원 관리 사무소로 쓰였던 건물이다.

 

 작고 납작한 건물이 눈에 띄였다.들어보니 이곳은 후궁들의 처소로 쓰이던 건물로 다른 건물에 비해 소박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특히 집복헌에는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와 정조의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가 거처 하면서 각각 사도세자와 순조를 낳은 곳이다.

정조는 수빈 박씨를 총애하여 집복헌 옆의 영춘헌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고 이곳에서 승하했다고 한다.

 

 <풍기대>보물 제 846호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긴 돌이 풍기대이고 이 풍기대에 풍기죽이라는 장대를 꽂고 그 장대에 깃발을 달아

깃발의 흔들림을 보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측했다. 이곳의 풍기대는 영조 8년(1732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춘당지>창경궁의 후원 연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못은 후원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를 뽑아 이곳에서 여흥을 즐기기 위해 서총대라는 축대를 쌓고 그 앞에 연못을 팠는데

그 연못이 바로 춘당지이다. 현재의 춘당지는 호리병 모양으로 두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원래의

춘당지는 작은 연못만 춘당지였고 큰 연못이 있던 자리는 내농포라 불리던 임금의 권농장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궁 안에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키워 백성들의 애환을 직접 느끼고 농사의 길흉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권농장까지 연못으로 만들어 배를 띄워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봄이 오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같은 화계를 상상하면서 각자 봄에 한번 더 오겠노라 다짐을 하며 춘당지에서 종묘와 창경궁에서의

두번째 역사탐방을 마무리 하였다. 고궁은 사실 그냥 돌아보면 멋지다는 것 외에는 크게 느끼는 바가 없지만 이렇듯 쉽고 재미난 역사

이야기와 함께 돌아보면 구경이 아닌 새로운 흥미진진한 역사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시간이다.

다음번 시간에는 또 어떤 곳을 가게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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