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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답사

역사탐방 종묘,창경궁(1)

다보등 2009. 3. 5. 18:08

2009년2월25일오후 3시

<역사탐방 > 종묘와 창경궁

 

첫번째 :종묘(宗廟)

 

 

지난달 경복궁에 이는 두번째 역사탐방시간으로 종묘와 창경궁에서 있었다.

며칠 날씨가 넘넘 따뜻했는데 하필 이날은 은근히 추운 날이라 모두들 추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태도는 진지했다. 마침 봄방학인지라 엄마따라 나온 아이들이 열심으로 경청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이뻤는지.....ㅎㅎ 나도 종묘는 처음이지만 다들 다른 고궁은 몇번씩 가보았지만 종묘는 처음 방문이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宗廟)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종묘의 여러 전각들을 돌아보며 김휴림 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간 잘 이해 되지 않았던 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례를 올릴 때 사용하던 향축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례에 참가할 헌관들이 대기했던 향대청에서는 동영상 자료를 잠깐 보았는데 제례를 올리는 격식이나 규모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정전은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세종 때 세워진 양녕전은 추존된 왕의 신위를 모신다는 차이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전 맞은편 건물인 공신당은 역대 왕조 공신들의 위패도 함께 모셨는데 공을 크게 세웠지만 후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정되었다는 조금은 공정성이 떨어졌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조 이성계의 최고 공신인 정도전이나 또 세종의 충신 김종서 같은 분들은 이 공신전에 배향되지 못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종묘를 돌아본 후에는 이궁인 창경궁을 돌아보았습니다. 창경궁은 세자나 대비 또는 후궁들이 머무는 궁의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한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창경궁 건물은 허물어지고 이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면서 창경원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이후 1984년에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다시 창경궁의 모습을 갖추게 된 몹시 어처구니 없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참여하신 분들 중에도 창경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군요.^^
성종 때 세워진 홍화문을 지나고 멋진 통명전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곧 꽃이 피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같은 화계를 감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전각들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 창경궁의 후원 연못인 춘당지에서 종묘와 창경궁 역사탐방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종묘사직(宗廟社稷) : 종묘는 왕실의 사당이고 사직은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조선은 농경 중심의 유교사회였다. 그러므로 성리학에 입각해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농사를 관장하는 사직신을 모시는 사직단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묘사직이란 말은 곧 나라의 운명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사극에서 가끔 나오는 대사 "폐하, 종묘사직을 지키시옵소서"라는 말은 나라의 근본을 지키라는 말이다. 이 종묘사직은 줄여서 종사(宗社)라 하기도 한다.......

 

 

 <중지당> 사각형의 연못과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 전형적인 원도방지(圓島方池)형 연못이다.

원도방지형 연못은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 형태로 사각형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해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종묘라는 제례공간의 특성에 따라 연못에 연꽃등을 심지 않았으며

물고기를 키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신당>공민왕 신당은 고려 공민왕의 제를 올리는 곳이다.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공주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벽면에는 준마도가 있다. 공민왕은 고려 말기의 왕으로 조선의 건국 세력인

이성계와 신흥사대부들을 등용했던 왕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신흥사대부들이

종묘를 세우면서 공민왕의 은혜를 기리는 뜻으로 공민왕 사당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어숙실>어숙실은 제례를 앞둔 왕과 세자가 목욕제계 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등 제사 준비를 하던 곳으로

재궁이라 부르기도 한다.왕은 제례 하루전에 이 어수길로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례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봄방학이라 엄마와 아이들이 많이 참석을 하였는데 아이들의 수업태도가 아주 진지했고 재미있어 했다.

은근히 추운 날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판위대>어숙실에서 제례준비를 마친 왕과 세자는 어숙실 서문을 나서 어로를 따라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임금과 세자는 동문앞에 판위대에서 잠시 예를 갖추고 정전으로 들어 간다.

임금은 전하판위 위에 서고 세자는 세자판위 위에 서서 예를 갖추게 된다.

 

 

 <정전>국보 제 227호

정전은 서쪽은 높은 곳으로 두어 서쪽 첫번째 신실에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차례로

3대 태종, 4대 세종, 7대 세조, 9대 성종, 11대 중종, 14대 선조, 16대 인조, 17대 효종,

 18대 현종,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23대 순조, 문조,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 27대 순종의 순으로 모셔져 있다.

(*문조 : 추존왕으로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였던 효명세자로

헌종이 익종으로 추존했다가 고종이 문조로 묘호를 바꾸었다)

 

 <공신당>정전 월대 아래 동쪽에 있는 공신당은 역대 왕조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임금이 승하하면

그 임금 때 큰 공을 세우고 죽은 신하들의 위패를 이 공신당에 모셨는데 이들을 배향공신이라 한다.

 배향공신에 선정되는 것은 왕과 함께 모셔지게 되는 영광으로 사대부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넓은 월대위에 세워진 건물로 신주를 모신 열아홉칸의 신실(감실이라고도 함)이 있고 양쪽 끝에는

협실과 협실앞으로 월랑이 나와  있다. 호기심에 세어보니 진짜 열아홉칸이 었다.ㅋㅋ

 

 

 

 

 <영녕전>보물 제 821호

세종원년에 2대 임금인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신위를 모시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정종은 당시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묘호도 받지못하고 공정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정종을 모시는 문제가 되자 세종은 별묘인 영녕전을 건립해 태조의 4대조 신위와 정종의

신위를 영녕전에 모셨다. 그후 영녕전에는 추존왕의 신위 그리고 단명하거나 대가 끊기는 등 위상이

적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졌다. 세종때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모두 6칸의 건물이었으나 점차

증축해 16칸이 되었다.

 

 

 

왜 종묘를 세우는가?

종묘의 건립은 유교의 조상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혼을 모시는

 사당과 백을 묻어 모시는 무덤을 각각 만들어 조상을 숭배하였다.특히 죽은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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