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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가 있는 충남 서산속으로 걷다
2010년 4월 4일
'우리땅 걷기'에서는 4월 4일 서산시에서 초청한 걷기 행사에 당일기행으로 다녀왔다.
요즘 각 지자체마다 올레길, 둘레길, 마실길,자락길 등등 여러 이름들의 길들을 내 놓는다.
그 일환으로 서산에서도 '아라메길'이라는 약간 아리송한 이름을 가진 길을 내었다고한다. '아라'는 바다를 일컫는다 하니 바닷길인가? 싶기도 하고..
암튼 길 이름이 좀 어렵다 어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 보물이 많은 보원사지도 불러보고 속세의 시름을 잊게 한다는
'개심사'를 거쳐 천주교 순교성지로 더 유명한 해미읍성, 해미향교 등 서산의 역사속을 거닐다 왔다.
<사진:우리땅 걷기 공윤님>
넉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온 180여명의 회원들로 출발부터 왁자하니 서산일원이 떠들석 하다~~ㅎㅎ
우리들은 운산면 고풍저수지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서산마애삼존불쪽으로 걸어 가기 시작을 한다.
<강댕이 미륵불>
서산시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이 미륵불은 강댕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지점의 고풍저수지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저수지로 수몰되어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 하며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고도 한다.
서산마애삼존불과 영판 닮은듯한 서산댁(?)인 문화해설사님이 열성적으로 마애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ㅎㅎ
그의 해설로 아주 쉽게 더욱 친근하게 마애삼존불의 미소가 따뜻하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 84호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운산면 소재지에서 원평리로 넘어가는 길로 고풍저수지를 옆에 끼고 강당골의 맑은 하천 건너편에 있다.
가야산의 끝자락인 수정봉 북쪽 산중턱에 위치한 커다란 암벽을 안쪽으로 파내고 들어가 부조형식으로 조각된 삼존불상이며 우리나라 마애불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제화갈라보살입상, 우측에 미륵반가사유상을 배치하였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불 형식이며 두 입상에 하나의 반가상이 조삭된 이례적인 이 삼존불상은 『법화경』의 석가와
미륵, 재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普願寺址)
보원사지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316호 서산시 운산면 강당계곡에 위치해 있다. 보원사는 통일신라 시대 창건, 고려초에 이르러 중창된 웅장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보원사가 위치한 강당계곡의 특징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계곡이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고풍리를 무릉동이라 하였다.
입구의 좁은 계곡을 지나 복숭아 꽃잎을 따라가면 별천지와 같은 마을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음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 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78년(고려 경종 3)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을 비롯한 다른 석조물들과 관련시켜 볼 때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단간을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있다.
보원사지 5층석탑/보물 제104호
통일신라~고려조의 전형적인 탑으로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부의 면석에 사자상과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부 각층의 옥개석은 얇고 넓게 퍼져서 백제계의 양식을 보여준다. 부처님의 사리장치를 목적으로 세웠으며
1968년 석탑 해체보수 시 4층 탑신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46행 99자씩 모두 4천5백여 글자가 적혀있는 규모가 큰 비석으로 법인국사 탄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임금 경종의 지시로 김정언이 찬하고 한윤이 글을 써 978년에 세워졌다. 이수의 네 모서리는 문양화한 구름을 가운데 두고
4마리의 용이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법인국사보승탑 /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부도탑이다. 법인국사(900-975)는 광주 고봉출생으로 휘가 탄문, 자는 대오, 성은 고씨이며 15세에
신엄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968년 광종으로부터 왕사에 봉해져 귀법사에 머물었고 974년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입적함에 따라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안치하였다.
보원사지를 지나 일락산을 넘어 개심사로 가기위해 가파른 산을 오르는 중이다. 가파른 산길은 기다란 줄이 계속 지.정체를 거듭하며 올랐다.
이곳 개심사로 넘어 가는 일락산 소나무길은 왼쪽으로 가야산을 끼고 가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고개마루에서 잠시 후미를 기다린후 신정일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글을 들으며 잠시 간식도 먹고 땀을 식힌다.
개심사 '산신각'이 불현듯 나타났다. 이제 개심사인가 보다~~
이곳 개심사는 나무기둥들이 재미난 절집이다~~~
개심사(開心寺)
충남 4대 사찰중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검당/문화재 자료 제358호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단지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집은 그 기둥이 얼마나 크고 힘차게 휘었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개심사 대웅전 /보물 제 143호
1914년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 "조선 성종조성화 이십년 갑진 6월 대웅전 중창"이란 묵서명이 발견되어 현재의 대웅전은 성종 6년에 화제로 소실된 것을
성종 15년에 중창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창건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높은 화강석 기단위에 남향하여
다포계와 주심포를 절충한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며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특히 양편 끝 기둥을 귀솟음과 안쏠림 수법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착시현상의 교정이 잘 이루어진 건물이다.
조형미가 뛰어난 범종각~~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
1969년 약 21.06km2의 거대한 산지를 개발하여 만든 농혀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 목장으로 봄에는 목장길을 따라
벚꽃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하얀 눈밭이 펼쳐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해미향교/충청남도 기념물 제117호
조선 태종 7년(1407)에 정해현과 여미현이 병합되어 해미현이 설치되었으며 같은 해 전국에 내려진 향교건립령에 의거 서산향교 보다
1년후인 태종 7년에 해미향교가 건립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내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 4현과 국내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 :우리땅 걷기 공윤님>
해미향교에서 나와 해미읍성으로 가는 길~~~
앞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서산고등학교이다.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옮겨 쌓은 것이다.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이며 이 성을 쌓도록 지시한 사람은 조선조 세번째 임금인 태종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선조 12년(1579)에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1쳔여명의 천주교신자를 처형했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해미읍성회화나무/기념물 제172호
학명 호야나무, 충청도사투리 호야나무(이 나무의 고유이름처럼 불리움)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천주교인들이 대량으로 처형당한 순교성지이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 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 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 이곳으로 끌려 온 천주교인들은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 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에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폐되어 2004년 4월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들을 거쳐 보호 관리 되고있음.
해미읍성안에는 이런 멋진 아름다운 보석같은 소나무숲이 있다.
서산시 관계자분들의 인사말과 설명이 곁들여 지고.....^^;;
풍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다녀가야 하는 풍수지리의 교과서!
남연군의 묘
1822년 남연군이 죽은 뒤 한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겠다고 한다. 그 지관(풍수가)은
2대에 결쳐 황제가 나올 가야산 동쪽의 땅과 만대에 영화를 누릴 광천 오서산을 지목하였으나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하였다고 한다
가야산 기슭에 현 남영군 묘소자리에 가야사가 있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할 명당자리를 찾았으나 가야사 자리가
명당 자리라는 것을 알고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곳에 남연군묘를 쓴 것이다. 후에 보덕사라는 절을 지어 죄책감을 씻고자 하였다 한다.
묘 뒤로 우뚝 솟은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좌로는 옥양봉과 만경봉이 청룡의 세를 이루고,
우로는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 등이 백호의 세를 이루어 무덤을 감싸고 있다.
右로는 옥양봉(621.4m)
左로는 가야봉(677.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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