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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낳은 경주남산 용장골 본문

우리땅 구석구석~~/경상도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낳은 경주남산 용장골

다보등 2010. 7. 27. 11:03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낳은 경주남산 용장골

2010년 7월 24일

 

삼릉에서 용장까지

 

경인년 7월 네째주 아름다운 천년의 고도 경주로 향했다. 경주로의 기행은 어쩐지 다른때와는 달리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다.

딸아이가 "이번엔 어디가?" 묻길래 "경주~~" 했더니 "경주?"라고 한다. 아마도 이 아이도 경주는 기행?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느끼나보다. 

경주하면 수학여행이 먼저 떠오르는데 신혼여행지가 경주였다는 조금 윗세대들도 있다. 경주가 처음인 사람은 처음인대로, 수학여행의 추억이 있는

사람은 그 기분으로,신혼여행지였던 이들에겐 그 추억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경주로 향했다. 기행 첫날 경주의 진산인 노천박물관 남산이

우리의 목적지인 것이다. 삼릉에서 출발을 하여 용장골로 하산을 하는 짧은 코스이지만 소나무가 아름다운 경애왕릉에서 경주를 만난다.

 

 

<경애왕릉>/사적 제 222호

신라 제55대 경애왕(924~927)을 모신 곳이다.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기린내)의 동안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휜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스칼렛 박수자님~~~^^*

 

 

<배리 삼릉>/사적 제 219호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154~184), 제53대 신덕왕(912~917), 제54대 경명왕(917~924)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르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신라 초기 아달라왕이 무려 700여년이란 시간적 간격이 있는 두 개의 왕릉과 한곳에

있다는것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속에서 머리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댕강 없어져 버린 머리에 잠시 충격에 휩싸인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머리만 진열되어 있는 불상도 있고 머리없는 몸체만 있는 불상도

많다.그 많은 불상들의 몸통이.... 또 머리가 다 어디로갔을까??

 

<마애관음보살상>

풍만한 얼굴에 머리위에는 삼면보관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 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선에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손가락을 고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높이 10m가량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결쳐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불상의 얼굴과 광배등이 크게 파손된 상태였으나 2007~2008년 경주시의 의뢰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정비하였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과 당초문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앙련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이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앏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선암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자연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았는데 깍아내다가 그만둔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사바위>

 

금오봉으로 향하는 건너편 자락에서 경주시 일원의 멋진 풍경과 함께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작년 낙동강이후로 오랜만에 김해에서 오신 '옹기와 억새'님과 함께 '별의별'

 

용장골<茸長谷>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400m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사터는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애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대현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경주남산 용장사곡 3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암반을 다음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경주남산 용장사지석불좌상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원만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내린 옷에는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잔잔한 무늬가 밀집되어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여 있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대좌 위에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린 자세로 앉아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아직 판독은 어려우나 글자가 10자 새겨져 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해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용장사지석불좌상의 뒤쪽편에 새겨진 자그마한  여래좌상은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은 크기와 위치에 있어

앞쪽의 목없는 석불좌상에 마음이 급해지면 지나칠뻔한 여래좌상이다.앙증맞은 크기 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

특이한 3층석탑 형식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 좌상으로 몸과 대좌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부분은 없어졌다.

왼쪽 어깨의 가사 띠매듭과 자연스러운 손 모양에 의해 승형(僧形)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삼국유사〉 권4 현유가(賢瑜珈)조에 보이는

'자씨석장육상'(慈氏石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이 상은 전체적으로 대좌에 비해 불상이 작은 편이지만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는

사실주의적인 면을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종을 창건한 대현스님이 염불을 하면서 석불좌상 주위를 돌면 불상 또한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을

돌렸다고 전해지는데 안타깝게도 머리부분이 없어졌다.

 

 

용장사지 내려가는 도중에 하늘높이 날아 오를것 같은 발사대에 앉아 있는 나로호(?)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다.

 

용장사지에서 내려오는 회원들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하하호호~~~~

 

 

 

용장골에서..../매월당 김시습

 

용장골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엔 사슴함께 잠들었어라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었는데

깰줄을 모르는구나 억새처마밑에서

뜰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매월당 김시습은 21세때(1455) 수양대군이 단종 폐위소식을 접하고는 통곡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29세 되던 해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용장사이다. 7년간 은적암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대릉원 주변의 쌈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경주에 오면 당연히 들르는 코스~~~황남빵을 구입하고~~~~^^*

 

 

삼릉에서 용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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