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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와 공주가 살았던 궁궐밖의 집 답사 본문

서울문화유산답사

조선의 왕자와 공주가 살았던 궁궐밖의 집 답사

다보등 2014. 4. 25. 08:18

조선의 왕자와 공주가 살았던 궁궐밖의 집 답사

 

 

 

 

 

4월은 정녕 이리 잔인한 달인가?

세월호의 비보를 접한 온 국민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슬픔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착잡한 마음을 추스리면서 카페 '나홀로 테마 여행'에서 진행하는 새로운 답사인 '왕가 답사'에 참석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조선시대 왕자와 공주들이 살았던 곳의 흔적을 찾아서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저자인 이순자선생님과 함께 서울 종로권역을 5시간 동안 설명을 들으며 다녔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경복궁을 비롯한 5대 궁궐이 있었고, 왕자와 공주 등 왕실 가족들이 살던 왕가(王家)가 있었다. 왕자와 공주들은 혼인을 하면 궁궐밖으로 나와 살았는데 궁, 궁가, 궁집, 궁방으로 불리었다한다.

왕의 어머니이지만 후궁이라 죽어서 종묘에 들지 못하는 분들의 사당에도 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한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의 대빈궁,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의 경우궁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사당들을 한 자리에 모은 곳이 칠궁이다. 지금 청와대 왼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소엔 출입은 할 수가 없다.

 

 

창의궁은 영조의 잠저이다.

잠저란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가 왕이 되었을 경우 이전에 살았던 집을 잠저(潛底)라 한다. 그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으로 추정되는 아름지기 건물 앞(종로구 통의동 )에서 답사에 대한 간략한 기본 설명을 듣고 출발한다.

 

 

 

 

일제강점기에 왕실재산이 국유화하면서 1908년 폐궁이 된 이후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었다가 8.15광복 후 대창산업주식회사 소유가 되었다. 이후에는 108개의 필지로 나뉘어져 금융감독연구원, 대림미술관, 코오롱빌딩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이 있었는데 1990년 태풍으로 쓰러져 고사되었다. 당시의 통의동 백송 모습이 추사의 그림에 남아있는지라 고사된 백송이나마 보고자 찾는이들이 잦다고 한다.

 

 

 

 

 

 

 

왕의 어머니이지만 후궁이라 죽어서 종묘에 들지 못하는 분들의 사당에도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의 대빈궁,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의 경우궁, 고종의 후궁으로 영왕을 낳은 순헌 귀비 엄씨의 덕안궁, 선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저경궁, 영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진종을 낳은 정빈 이씨의 연호궁,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육상궁,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1908년)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겨 한 자리에 모은 곳이 칠궁이다. 지금 청와대 왼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입은 할 수가 없다.

 

▼ 사진속 도로변에 칠궁의 외삼문이 보인다.

 

 

영빈이씨의 사당 '선희궁(宣嬉宮)'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사당으로 순조 1년(1908년) 육상궁으로 옮겨져 경우궁 묘사안에 합사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선희궁지에는 '국립서울농아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복원된 선희궁이 있다.

특히 이곳에는 정조가 자주 오르던 세심대가 있다

 

 

 

 

 

 

 

세심대에 올라 바라 본 한양 전경

선희궁 뒤편의 야트막한 야산엔 세심대라 하여 정조가 자주 오르던 정자가 있다. 서울시내가 시원스레 한눈에 보인다.

당시 정조가 이곳에 올라 바라 보았을 한양을 상상하며 아비를 잃은 정조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비운의 왕자 무안대군이 살다가 후궁들의 거처가 된 자수궁(慈壽宮)

종로구 옥인동 45번지의 '자수궁'은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이다. 무안대군은 동생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아야 했고, 제 1차 왕자의 난 때 유배 가던 중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이곳에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다. 이때부터 왕이 죽으면 그 후궁들이 거처할 곳이라 하여 '자수궁'이라고 했다.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한때 여승방이 되기도 했으며 명나라 여인 굴씨 부인(소현세자가 중국에서 데려 온 후궁)이 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염병환자를 받던 순화병원이 들어섰다가 8.15 해방 이후 서울시립중부병원으로 바뀌었고 1977년 병원이전 이후 현재 군인아파트, 종로구보건소 등이 들어섰다.

 

 

 

 

 

 

 

'라튀떡'은 뭘까?

어떤 음식일짜?

맛은 어떨지 궁금하다~

 

 

 

사직단에 대해 잠시 설명할 때 주변을 살펴보니 하늘이 너무 화창하고 꽃은 너무 붉었다.

 

 

 

선조의 잠저 '도정궁'

덕흥대원군이 사셨고 선조가 태어나셨던 곳이다.대원군의 후손들에 의해 종택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도정궁은 수십년전까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인왕산 자락에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도정궁 본채 자리로  추정되는 운경기념관까지 올라가면 서울의 광화문 일대는 물론 남산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도정궁은 조선 최후의 잠저로 남았다가 1931년 일제는 도정궁 일대를 200여 필지로 분할해 버렸다. 본가를 철저히 훼손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짓밟기 위한 목적이었다. 삽시간에 그저 그런 주택가로 변모하고 말았다. 지금은 운경 기념관 자리에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정도이다. 최대한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는 도정궁 터에 들어서니 마침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뒷뜰에는 화덕과 가마솥, 장독대 등이 있어 흔적조차 없는 다른 궁들에 비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이곳은 집안 곳곳에 봄꽃이 피어서 한참동안 꽃 향기에 취해보았다.

 

 

 

 

 

 

세종로를 지나서 인사동 방향으로 가던 중 본 광경

합죽선에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저 지나치고 말았으나 저런 부채 한개쯤 갖고 싶다.

 

 

 

 

 

 

 

수진궁터엔 역시 빌딩이 들어 서 있고...

제안대군이 살다 미혼의 왕자, 공주를 모신 사당 수진궁(壽進宮)

수진궁은 한성의 중부 수진방, 현재의 수송동 51번지에 있던 사당으로 조선왕조의 미혼으로 또는 자손이 없어 사후에 제사를 모실 수 없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후궁들을 모시던 사당이다.

그래서 서울 장안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바로 '수진궁 귀신'으로 여기게 되었는데 장가 못 가고 죽은 총각귀신이나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귀신들이 수진궁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숙명여학교가 된 용동궁(龍洞宮)

수송동 80번지 근처에 있던 궁가로 숙명여고가 있었다. 용동궁은 처음에 서부 황화방의 경운궁(현 덕수궁)안에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궁이었다. 순회세자 사후 덕빈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세자빈의 속궁으로 이어졌고 중부 수진방으로 옮겨져서 박동궁으로도 불리었다. 고종때 용동궁은 엄황귀비의 소유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순헌황귀비 엄씨는 자신의 소유인 용동궁을 하사하여 1906년 명신여학교를 개교하였다. 이후 숙명여학교로 바뀌었으며 1980년 숙명여고가 강남구 도곡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면서 코리안빌딩과 석탄빌딩이 들어섰다.

 

 

조계사를 지나서...

 

 

 

의친왕 저택 '사동궁(寺洞宮)'

고종의 서 2남 의친왕 이강이 살던 곳이다. 관훈동 192번지 일대로 조계사앞에서 인사동 수도약국 앞까지 만여평에 이르는 큰 궁가였다고 한다.

2011년 9월20일자 어느 신문에 의하면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이 기거했던 사동궁은 '주차장'으로 만들어 멸실시키고 일본 병참기지는 8억원의 사업비를 들어 복원하는 등 문화재 행정이 엉망이라는 지적이 재기됐다. 국회 문체부 소속 한나라당 이철우의원은 국회에서 열린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우리 정부가 궁은 허물고 일제의 건물은 복원하고 있다'며 질타했다.

 

 

 

 

명온공주가 살았으며 민승호가 폭사 당한 죽동궁(竹洞宮)

순조의 딸 명온공주가 동녕위 김현근에게 출가하여 살았다. 현재는 관훈빌딩 등의 빌딩가로 변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순화궁(順和宮)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살던 곳으로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헌종 사후 순화궁 경빈김씨가 이곳에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이완용이 살았고, 요정 태화관이 되었다. 현재는 태화빌딩과 하나로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일요일 인사동 거리는 인산인해이다...

 

 

 

 

세종이 승하한 곳이라는데 훗날 이렇게 갇힌 터가 될 줄 알았을까??

왕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주었던 안국동별궁(安洞別宮)

종로구 안국동 175번지 일대로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가였다. 세종은 말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신다.

영응대군은 부인이 셋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고 길안현주만 두었다. 이후 성종때 영응대군의 부인이 이 궁을 성종에게 바쳤고 성종은 생부 의경세자의 사당(의경묘)을 세워 월산대군으로 하여금 봉사케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때 혜순옹주, 인조때 청명공주, 숙종때 연령군의 궁가가 된다.

고종때는 왕세자 순종의 가례소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영휘와 최창학에게 팔렸고 현재 풍문여고와 안국빌딩이 들어 서 있다.

 

 

풍문여고 교사앞에 있던 안국동별궁 건물들은 학생수로 인해 운동장이 협소해지면서 철거되어 골프장 등으로 옮겨지게 된다.

문화재청은  경기도 고양시 H골프장의 목조 고건물이 서울특별시 고적편의 배치도와 풍문여고 전경사진에 나타난 안동별궁의 현광루.경연당과 건물 형태와 규모 등이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

갑신정변때 고종이 피신하였는데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일이 있는 후, 경우궁을 이건하게 되는데 인왕동(자수궁)으로 이건하였다. 순종 1년에는 제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에 따라 1908년 다른 궁들과 함께 육상궁내에 이안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이자 고종의 종형인 완림군 이재원이 살던 계동궁터(桂洞宮)

갑신정변때 고종과 명성황후가 경우궁으로 피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계동궁으로 옮겼다가 창덕궁으로 돌아가셨다. 이재원 사후 계동궁은 민영휘가 차지한다. 민영휘는 이곳에 휘문의숙을 세워 휘문고등학교가 되었다. 1978년 강남 이전후 이곳에 현대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건축인들의 성지였던 '공간'은

이제 남의 손으로 넘어가서 예전의 '공간'이 아니다

 

 

 

 

고종의 잠저 운현궁 그 한켠에 일본문화원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 이 넓은 서울장안에서 문화원 있을 곳이 여기뿐이었는지...

 

 

 

고종의 잠저인 '운현궁(雲峴宮)'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돌아가심에 따라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26대 왕에 올랐다. 따라서 고종이 왕이 되기 이전에 살던 잠저인 이곳은 운현(구름재)에 위치해 있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희빈의 사당 대빈궁(大嬪宮)

현재 종로세무소와 원불교빌딩, 종로오피스텔 부근이다. 그래도 전에는 대빈궁길이라는 이름만이 남아 있었으나 이젠 것도 도로명이 개편되면서 사직동길로 바뀌어 길이름으로라도 남아 있지 않으니...

 

전계대원군의 사당 누동궁(樓洞宮)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고 철종이 태어난 곳으로 중부 경행방(현재 종로구 익선동 166버지)에 있었다. 철종은 즉위 후 형 영평군을 이 집에 살게하였으며 고종 6년(1869)에는 안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대빈궁과 누동궁이 있었다는 그 골목이다.

그나마 옛모습을 그려 볼 수도 있는 이 골목길도 철거 대상이라고 한다. 서울시는 2004년에 '익선동 개발계획'을 발표하였고 아파트, 관광호텔,오피스텔, 근린생활시설로 바뀔 예정이다.

문화는 거창한게 아니라 이런 골목 처럼 생활하는 장소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도 훌륭한 문화일 것인데

우리는 이 꼴을 바라보지 못하고 헐어내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 얼마 후면 볼 수 없을 서울 한 복판의 골목을 담아둔다...

 

 

 

오늘 하루 5시간의 1차 답사는 이렇게 마쳤다.

나머지 2차 답사는 혜화역 부근 서울대 의과대학 본관건물앞에서 부터 답사를 할 예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