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베가-폰프리아 24km/산티아고순례길 28일차 본문
2018년 6월 8일, 금욜, 비
산티아고순례길 34일의 계획된 여정에서 이제 일주일을 남겨 놓은 날 아침이다. 매일 한개씩 꺼내 먹던 달콤한 사탕이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초반의 막막하였던 34일이라는 여정이 끝으로 치달으며 하루씩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게 되는 그런 날이 왔다. 때로는 나만의 속도로 걷기도 하고, 길을 걸으며 너무 행복한 순간들도 너무 많았고, 가끔은 짜증도 나고, 혼자가 아니라서 위로가 되고, 때론 혼자가 아니라서 불편하기도 한 여러 날들이 흘러갔다.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여정에 여러가지 변수가 있겠으나 그 모든 순간들이 다 행복하고 기쁨임을 알고 있다. 마지막이 끝이 아니고 시작임을 미리 나에게 다짐을 한다.
오늘 가는 길목에 오 세브레이로는 성모발현지가 있다. 성스러운 성모발현지까지 묵언하라는 단장님의 부탁이 있었다. 갑자기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하지말라하니 부자연스럽다. 지나치는 까미노들이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하면 작은 소리로 답을 한다. 영문을 모르는 순례자들이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 길이 강제 묵언길은 아니고 그저 '오 세브레이로'가 성지인지라 경건한 마음으로 가자는 뜻인듯.
산티아고순례길 중 3대 언덕(?)이 있다.
피레네산맥 1430m, 철의십자가 1504m, 오 세브레이로 1330m가 있다. 순례길은 중간에 많은 언덕들이 있으나 1,000m가 넘으면서 계속된 오르막을 올라야 하여 순례자들이 힘들다고 느끼는 공포의 구간이다.
암튼 오늘 그중 마지막 언덕인 오 세브레이로로 가는 길은 해발 629m에서 시작해서 1330m 오르는 길로 그동안 걷던 길들 중 많이 힘든 경사로를 올라야 한다. 비가 와서 특히나 힘들었던.
바나나, 요플레, 어제 싸두었던 김밥 1/4쪽 등 다른 날 아침보다 넉넉하게 먹고 출발을 했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렸다. 비는 잠시 그쳤다 내렸다하며 종일 비가 왔다.
그동안과는 다른 급 오르막인데 비가 와서 진흙탕 길이다. 더군다나 말똥이 그대로 비에 섞인 진흙길이라 냄새도 고약하고...
두어시간 걸어올라 오전 8시반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우유가 듬뿍 들어간 따뜻하고 고소한 커피가 어찌나 좋던지.
비는 다시 굵어지고 말없이 묵묵히 걸어 오른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서니 남은 거리가 160km라고 적혀있다. 뭔지 모를 뿌듯함.
오전10시 30분이 넘어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을 땐 가는 비로 변했다. 멋진 풍경은 비와 안개속으로 사라져 보이질 않는다. 그곳에서 갈리시안슾을 먹었다. 시래기와 감자를 넣고 푹 고은 시래기국 같은데 맛있었다. 남은 김밥이랑 같이 한그릇 싹비웠다.
식당을 나서니 비가 다시 세차지고 바람까지 불어서 빠른 걸음으로 오 세브레이로를 떠났다.
비속을 걸어 알토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비를 잠시 피할겸 바에 들어갔다. 비가 오는 궂은 날이지만 레몬맥주를 한 잔 마셨는데 의외로 정말 맛있었다. 생 레몬을 즉석에서 짜서 맥주에 넣어준다. 마치 레몬에이드를 마시는 것 같았다. 이후 순례길 일정 중 대부분 레몬맥주를 마셨다는.
비는 살짝 가늘어졌으나 여전히 빗속을 50여분 더 걸어 오후 2시쯤 오늘 묵을 마을 폰프리아 알베르게에 도착을 하였다. 고원지대의 마지막에 위치한 이 마을엔 알베르게도 이곳 뿐인듯 싶다. 주변에 가게도 식당도 없는 곳이다. 사설 알베르게인지라 9유로이고, 디너가 9유로해서 18유로를 냈다.
침대도 튼튼하고 침대간격도 넓직하다. 와이파이도 잘 된다.
날씨는 고약하나 빗속을 걸은 탓으로 세탁을 했다. 마르지 않을 것이지만.
갈리시아 지방에서 처음 만나는 오 세브레이로는 성체와 성배의 기적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또한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에게 오 세브레이로는 한 명의 인간이 만들어 낸 드라마틱한 기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 세브레이로에서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부활시킨 선구자 돈 엘리아스 발리냐의 흉상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오 세브레이로의 교구 신부로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부활 시키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노란색의 페인트로 칠한 화살표 표시를 처음 만들었으며 까미노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강화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소수의 신앙인의 순례길로 남아있을 것이다.
몇 백년 동안 사용되었던 갈리시아 지방의 삶의 양식인 빠요사는 스페인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가장 원시적이고 오래된 구조물이라고. 돌로 원형이나 타원형의 작은 구조물을 쌓고 가운데에는 길고 둥글게 땋은 밀짚으로 원추형 지붕을 세웠다. 고대 켈트인들이 주거용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빠요사에는 가축이 함께 생활했으며, 굴뚝도 없이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우는 극단적 형태의 원시 건축물이었다. 오 세브레이로에 남아있던 세 채의 빠요사 가운데 나머지 두 채는 알베르게로 재건축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제비와 시래기를 넣고 끓인 슾으로 된장국같이 맛있었다. 비맞고 추운 날 따끈한 시래기국이 정말 맛있었다.
구름이 능선 위를 흐르며 그림같은 풍경이 만들어지며 발아래로는 아름다운 고원지대의 모습이 펼쳐진다.
오늘 여정의 목적지인 폰프리아는 좁은 고원지대의 마지막에 위치한 마을로 정상에 올라온 순례자에게 따뜻한 쉼터가 기다리고 있다.
7시 식사시간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모였다.
음식은 부족함없이 푸짐하게 담아 나왔다. 낮에 먹었던 시래기국과 비스무리한 숲이 나왔다. 커닥란 접시에 소고기찜과 밥이 나와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식사시간이 나름 좋았다.
'해외 트레킹 > 산티아고순례길 800k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모스-페레리로스 28km/산티아고순례길 30일차 (0) | 2021.01.09 |
---|---|
폰프리아-사모스 18km/산티아고순례길 29일차 (0) | 2021.01.07 |
까까벨로스 - 베가 데 발까르세 26km/산티아고순례길 27일차 (0) | 2021.01.03 |
몰리나세카-까까벨로스 24.3km/산티아고순례길 26일차 (0) | 2020.12.29 |
폰세바돈 - 몰리나세까 20km/산티아고순례길 25일차 (0) | 2020.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