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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용선의 터 -창녕 관룡사 본문

사찰여행

반야용선의 터 -창녕 관룡사

다보등 2009. 10. 10. 14:39

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觀龍寺)는 신라시대 8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관이 수려한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관룡사의 '관룡(觀龍)'은 사적기에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 숨어 있던 아홉마리의 용이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목격하였다 하여 '용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전한다. 초창시기는 정확히 밝혀진바 없으나 약사전에서 발견된

묵서에 '영화오년기유'라고 기록하였으며 절에 비장된 사기에도 신라 349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관룡사 석문. 겨우 사람 키높이를 넘고 두사람 정도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석문 하나...

 허리 숙여 겸양하고 하심(下心)하라는 부처님의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_()_

 

<<창녕군지>>에 따르면 583년 증법국사가 초창하여 신라의 8대사찰로서 원효대사가 제자 일천여명과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체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오더니 화왕산 마루인 월영삼지로부터 아홉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관룡사의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보고 있다.

 

관룡사 대웅전 / 보물 제 212호

  이 건물은 1965년 해체 복원 때 1749년 중창할 당시 써 놓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초창은 1401년이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1618년에 다시 중건 하였음이 밝혀졌다.

 

 

 

 

임진왜란 때도 타지 않고 남은 유일한 전각인 약사전(보물 제146호)은 앞,옆 각각 1칸씩의 전각으로 측면에서 보면 사람 人자 모양이며

지붕이 훨씬 크고 무거운 구조인데도 아래 기둥들이 끄떡없이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다.

 

 

관룡사 약사전 / 보물 제 146호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의 맞배기와집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으며 그 사이의 포벽에도 구조물이 생략되어 있다.

창방의 끝을 그대로 첨차로 만들고 있는데 이는 주심포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수법이다. 그러나 내부의 첨차는 다포계 건물에서 처럼

원호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두가지 계통의 첨차를 사용한 예는 1404년경의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 56호)과 1473년 중건의 도갑사 해탈문

(국보 제50호)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시기도 상한을 15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지붕이 기둥 간격에 비하여 두 배 가까이 길어

연 면적은 좁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균형잡힌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19호

약사전에 모셔진 고려시대 불상이다. 높은 대좌 위에 특이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불상 높이 1.1m, 대좌 높이 0.86m이며

광배는 없어졌다.

 

<약사전 석조여래좌상과 소박한 3층 석탑.......>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 212호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위에는 춤이 큰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세부처리가 고식인

포작을 올려놓았다. 포작은 안팍 모두 2출목이며 출목 바로 위의 살미첨차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는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게 한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단청은 금 단청이다. 이 건물은 1966년 해체 복원 때 1749년 중창할 당시 써 놓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초창은 1401년이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 1618년에 다시 중건하였음이 밝혀졌다.

 

 

 

<<산신각>>

 

 

 

 

 

 

 

 

20여분 용선대에 높이 올라 앉아 계신 돌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고즈녁한 오솔길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길이다.

구름위에 앉아 계신듯한 부처님은 반야용선을 타고 항해중인듯이 보인다. 반야용선! 이는 중생을 고통없는 피안의 세상으로

건너게 해주는 배를 뜻한다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반야용선이라 부른다.

 

관룡사 서쪽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 295호

관룡산(739.7m) 정상 부근의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 2.98m, 불신 높이 1.81m, 대좌높이 1.17m이다. 높은 대좌위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앉았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똑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높은 대좌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은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4각형에 가까우나 풍만하다.

목의 삼도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를 지향하고 있다.

 

 

소나무 숲이 만든 푸른 물결 위 용선대는 바다로 나아가는 한 척의 배.......

 

이곳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_()_

 

우리나라 부처님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관룡사 석장승은 한 쌍으로 조성되어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이 장승은 관룡사 소유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이지만 그 외에도 사찰토지 안에서의

사냥과 어로를 금지하는 호법, 절에 잡귀가 출입하는 것을 막아 주는 수호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을 보충해 주는 비보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점에서 이 석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 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남장승>>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은 상투와 같은 둥근 머리와 툭 튀어 나온 왕방울 눈, 주먹 코 등이 투박하게 표현 되어있다.

 

<<여장승>>

남장승의 턱이 각진데 비해 여장승은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는 차이가 있다.

두장승은 모두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위상에 걸맞게 다문 입술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간 예술이 갖는 소박함과 친밀함도 잘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