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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6대 단종의 능-장릉(영월)- 본문
서울에서 2시간여를 달려 영월이다. 생각보다 많이 가깝다.
아직은 도로변 가로수나 주변의 산기슭에도 꽃은 없다. 산기슭엔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을뿐이다.
그래도 3월 중순이 지나지 않았는가? 예년보다 눈도 많고 추운 3월의 봄이지만 그래도 봄이잖은가? 오늘은 따뜻하다.
영월에 진입하면서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을 먼저 찾았다.
장릉 (영월)/사적 제196호
단종(1441~1457)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4개월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후 3일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이 계우정난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1457년(세조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 해 10월에 다시 폐서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1516년(중종11) 장릉은 비로소 무덤을 갖출 수 있었고 1698년(숙종 24)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곡장 뒤에서 바라 본 장릉의 능침 -단종역사관 사진 참조-
▼곡장 뒤에서 바라 본 사릉의 능침(경기도 남양주시 소재)-단종역사관 사진참조-
사릉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영월장릉은 'ㄱ'자형으로 껶여 있다.
<정자각>
영천(靈泉)
이 영천은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비각>
<장판옥>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수복실>
이 건물은 능과 경내를 괸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9년(1733)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 것이다.
<배식단>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엄홍도 정여각>
이 비각은 엄홍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홍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종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재실>
장릉 재실안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 고목이 남아 있어 장릉에 얽힌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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