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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 9호 본문

바람길따라서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 9호

다보등 2010. 6. 8. 09:19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

소재지 :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랜된 탑의 하나로 비례구성과 구조수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1500여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켜 온 유적이다. 아마도 이 탑을 만든 백제인들이 신라로 건너가 불국사 다보탑이나

석가탑을 만들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에는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

 

이 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 세워진 석탑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탑의 높이는 8.3m이며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여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불상이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중엽에 창건된 것이다.

정림사는 이절의 고려시대 이름인데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 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초에 절을 다시 세울 때 백제시대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