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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주천강가의 '요선정' & '마애불' 본문
영월 주천강가의 '요선정' & '마애불'
문화재 자료 제41호(영월군)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
남한강의 한 갈래인 주천강 상류, 풍경이 아름다운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요선정.
요선정의 유래는 조선 중기 유명한 풍류객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 경치에 반하여 바위에 "요선암" 이란
글씨를 새긴데서 기인한다고 전해 온다.현재의 정자는 1913년 마을 유지인 원세하, 곽태응, 이응호 등이 숙종, 영조,
정조의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본래 이들 시판은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한 청허루에
있었던 것인데 누각이 폐허가 되어 일제강점기때 일인의 수중에 들어 갔으나 이를 김병위가 1909년 환수하여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월 땅에 세분 군왕의 어제어필시문이 내려진 것은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대왕께서는 144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 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憑虛,晴虛兩樓詩(빙허, 청허양루시) 한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 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께서는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산왕의 어제시 옆에 걸게 하였다." -다음에서 검색-
요선정 (邀僊亭)/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1호
정자의 앞면 오른쪽에는 이응호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요선(邀僊)이란 신선을 맞이 한다는 뜻이라 하고......모성헌이란 임금을 그린다는 뜻이라고...
무릉리 마애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신경림시인이 바위에서 걸어 나와 주천강에서 손을 씻고 주천장터를 휘젖고 다니다가 별들이 하늘에 숨어버릴 즈음
허겁지겁 바위속으로 들어와 앉는다고 노래했던 마애불이다.얼핏보면 입상처럼 보이지만 좌상이다.
주천강가의 마애불...../신경림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 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 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 오는 새벽
별들은 점잖치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 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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