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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의 흔적을 찾아서(갑신정변, 그 삼일천하의 행로) 본문
근대역사의 흔적을 찾아서....갑신정변, 그 삼일천하의 행로
우정총국에서 북묘까지
2011년 12월4일(일)
답사 안내 : 이 순 우(우리문화재자료 연구소장)
갑신정변?
고종 21년(1884) 갑신년 음력 10월에 일어난 정변으로 개화당이 청나라의 속화정책에 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며 일으켰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화당은 왕조의 내정을 개혁하려고 사대당의 중심 인물인 민씨 일파를 살해하고 일본의 힘을 빌어 새정권을 세웠다가 사흘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일만에 실패하였다 하여서 삼일천하라고도 한다.)이로 인해 개화댱과 반대되는 수구당은 더욱 보수화하고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해져 조선을 둘러 싼 일본과 청나라양국의 쟁탁전이 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갑신정변 3일간 행로 : 우정총국→묄렌도로프의 집→안동별궁→표훈원/충훈부자리→사동궁/의친왕저→죽동궁/민영익집터→명월관지점(태화관 자리)→서울줌심점 표석→일본공사관 터→경우궁/계동궁→홍영식집터/박규수집터/제중원터(헌법재판소)→김옥균 집터/서재필 집터→취운정 터→창덕궁 후원 뒷길→북묘터
▶ 우연히 답사일이 12월4일로 127년전 갑신정변이 발생했던 우정국 낙성연 바로 그날(양력12월4일.음력10월17일)이어서 같은 날, 같은 계절적인 배경에 그 현장과 행로를 그대로 따라가 본다는 점에서 실감나고 색다란 답사의 묘미가 있을듯 하다.30여명의 나홀로테마여행회원들이 우정국(현 체신기념관)앞에서 만났다.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하지만 기온상으로 127년전 그때가 좀 더 추워다한다. 한강물이 조금 살살얼었다는 기록이 그 당시에 있었다한다. 우리문화재 연구소장이신 이순우선생님의 진행으로 '갑신정변, 그 삼일천하의 행로'라는 제목의 근대역사의 답사를 시작하었다. 1,2,3회를 진행하였는데 나는 이번3회만 참석을 하여 앞선 1,2회를 참여하지 못했음이 많이 아쉬웠다.
근대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제하의 몇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순우선생께서 진행하시는 특별답사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근대 문화유산과 일제 강점하의 아픈 역사의 흔적과 현장을 찾아보는 답사이다. 특히 답사지를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근대 역사의 현장을 실제로 둘러보고 익힌다는 의미도 크다. 우정총국, 이곳은 원래 전의감이 자리했던 곳으로 1884년 4월22일에 홍영식의 주창으로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처음 도입될 당시 우정총국으로 전환된 공간이다.우정업무의 개시는 그해 11월18일부터였으며 곧이어 12월4일 이를 기념하는 개설연이 벌어진 것을 기화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현장이기도 하다. 연회가 거행되고 옆집에서 일어난 불길에 우영사 민영익이 문밖으로 나가다가 서재필이 이끄는 사관생도 10여명에 의해 피습된 사건이다.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시작이었다.
해방이후에도 이곳은 원래의 건물이 용케도 보존이 되어 1956년부터 체신부에서 관리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1970년 사적 제213호 지정과 1972년 체신기념관으로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신기념관 뒤편에 있는 충정공 민영환선생동상은 이번 답사와는 관련성이 없지만 다함께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보수파였던 부친 민겸호와는 달리 개화파 위정자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상소하고, 조병세의 체포로 무산되자 2차 상소를 전개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자결순국함으로서 국은에 보답하고 국민을 깨우쳐 주기로 결심하고 1905년 11월30일<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조계사 뒷편으로 이동하여 갑신정변 당시 피습된 민영익을 구출한 묄렌도르프(독일인)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집터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관의 의사였던 알렌을 통해 치료를 하게 했던 공간이 바로 이곳 어디쯤이라 하는데...묄렌도르프 부인이 정리한 『묄렌도르프 전기』에는 "집 두채로 구성되어 있는 본채앞에는 널찍한 공지가 있어서 후에 여기다 정구장과 정원을 마련하였다...같은 집 울타리 안에는 또 제2,제3,제4의 집채들이 있으며...이런 건물들 가운데의 한 채에 사무소가 설치되고 다른 건물에는 도서실,서재가 들어 앉고 나머지 건물에는 객실과 방들이 손님을 위해서 꾸며졌다"고 묘사되어 있다.
▶안동별궁(조선시대 왕족들이 거주하던 별궁)이 있던 공간인 풍문여고로 이동하였으나 문이 잠겨 들어 가지는 못하고 교문밖에서 설명을 듣고...갑신정변 당시에는 처음에 이곳에 화약을 터트려 불을 놓아 거사의 신호탄으로 삼을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이곳을 거사지점으로 잡은 것은 바로 이웃하던 곳이 서광범의 집이었으므로 거사준비와 월담이 용이했던 탓이라고 전한다.
<충훈부 터> 조선시대 이래 상훈에 관한 업무는 충훈부에 속하는 것이었으나 갑오개혁 당시 기공국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표훈원으로 변경되기에 이른다.1900년 훈장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한제국시절의 훈장수여 및 제조업무도 표훈원의 몫이 되었다.1899년에 설치된 표훈원은 훈위,훈등,연금,훈장,기장,포장,외국훈장의 수령 및 패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기구이다. 이곳은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원로대신 조병세가 조약파기와 을사5적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는 항거를 지속하다가 끝내 자결순국한 공간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는 패망 직전 친일관료와 황족 등에게 무더기 훈장을 발급한 일로 오히려 더 업무가 바빠지는 기현상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풍문여고 교문에서 길을 건너 인사동의 시작이자 끝인 입구에 자그마한 표지판으로 서 있다.
사동궁/의친왕저
인사동길 중간 부분에 해당하며 서쪽으로 견지동과 맞붙어 잇는 관훈동 196번지 구역은 황이자(皇 2子)인 의친황 이강(1900년 8월 친왕첵봉)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지금 주차장으로 변한 이곳의 주변은 사동궁의 위치를 찾기가 쉽지않다. 지도를 보며 설명하시는 이순우선생님...일제강점기에는 의친왕이 일제로부터 '이강공'이라는 신분을 부여받았으므로 이 시기에 사진자료에는 의레 '이강공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930년 6월에 의친왕이 은거를 청하게 되자 '이건공'이 공가를 세습하게 되었으므로 이 이후에는 '이건공저'로 전환되었다. 1910년 초기의 광고문안에 보면 간혹 '제국마차상회'란 것이 의친왕궁에 주소지로 표기된 사례도 눈에 띈다. 번화한 도로와 인접한 저택의 일부가 가게터로 변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의친왕의 집인 사동궁 바로 남쪽에 인접한 구역은 민영익의 집이었던 '죽동궁'이 있었다. 죽동궁이라는 표현은 순조의 부마 동녕위 김현근(명온공주)의 정신병을 치료할 때 죽도(竹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하여 죽도궁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민영익의 집이었던 죽동궁터에서 설명은 이어지고....주변의 변화로 그 시절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저 막연히 끄덕이는 것 밖에는.....
죽동궁이 있던 자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위치한 '태화빌딩'은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명월관지점이 있던 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순화궁(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거처 및 사당)이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1907년 6월에 경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던 이윤용이 재빨리 이곳을 차지하였고 다시 망국 직후인 1911년 초에 이 집은 그의 동생인 이완용에게 넘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태화빌딩 로비에 걸려있는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도 보고...
민족대표들은 기미년(1919) 3월 1일 정오, 이곳(당시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선언하였다. 이로써 3.1운동에 점화되어 전 민족의 참여로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유서깊은 장소에 태화빌딩을 건축하여 이를 길이 남기기 위하여 선언하는 장면을 기록화로 제작 게시하였다.-태화기독교 사회복지관-
태화빌딩 좌측의 하나로빌딩 로비 한쪽에 위치한 서울의 중심점을 표시한 표지돌(건양 원년 1896)을 둘러 보았다.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이란 고려 왕조에 이어 조선조를 창시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별궁으로 이용되었던 서울(한양)을 도읍지로 삼고 1395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북한산 자락에 경복궁을 건축한 후 북악산, 인왕산, 낙산을 연결하여 4대문과 성곽을 쌓고 서울 도읍의 중앙지점을 이곳으로 잡아 지표석을 세웠던 것이다. 그 후 대한제국 때 건국의 번지(지명) 중심지점이라 하여 건양원년(1896)에 이곳이 서울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 표지석을 세웠다.사각형 중심돌을 사이에 두고 사방에 팔각형 기둥둘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우리는 다시 '일본공사관 터'를 찾아 복잡한 인사동길로 접어 들었다. 자칫 일행을 놓치기 쉽상이다.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따라잡아야 한다. 지금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자리한 경운동 일대는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원래 이곳은 교동이라 불렸던 동네에 속하며 금릉위 박영효의 집이었던 곳이다. 일본 공사관은 1880년 12월에 새문밖 청수관에 처음 개설하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불에 탔고 그 이후 남산 아래에 임시로 공사관을 두었다가 1884년 4월이 박영효의 집을 사서 옮겨 온 것이다. 이때 이 구역안에서 양식 건물로 공사관을 신축하여 그해 천장절을 기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기도 했으나 갑신정변의 와중에 이 건물은 한달여만에 소실되었다.이 당시 일본공사는 '타케조에 신이치로'였으며 그는 김옥균 등과 사전에 모의하고 정변이 거행되는 와중에 개화당 측에 일본군대의 병력을 지원하였다.
일본공사관은 흔적도 없고 사진에 보이는 한옥은 현대건물로 이 집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두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지은 두채의 주택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룡이 설계하였으며 현재 이 집은 음식점으로 고쳐서 사용되고 있다. 박길룡은 전통적인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은 안방과 불편한 동산을 개선하고자 모든 방들이 집약된 H자형 평면으로 설계하였다. 1930년대에 근대적 주거걍식이 전통 한옥에 접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뒤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이다.
경우궁 터/계동궁 터(현대사옥 빌딩)
현대사옥 빌딩이 자리한 공간은 옛 휘문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경우궁,계동궁, 관상감이 이웃하여 나란히 포진하고 있던 지역이다. 이 가운데 경우궁은 순조 24년(1824)에 설치된 것으로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를 모신 사당이다. 그리고 남쪽으로 이웃하던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되는 완림군의 집이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 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속여 왕과 왕비를 경우궁과 계동궁으로 고종이 피신한 바도 있다.경우궁은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와 국왕의 호위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개화당 일파가 고종을 모시고 첫번째 피신처로 삼은 곳이다. 이곳에서 사대당의 민태호,조영하,민영목,이조연,윤태준,한규직과 내관 유재현이 잇달아 참살당하였다.하지만 그 당시 추운 날씨에 방한장구가 부족하고 음식형편이 마땅치 않다하여 이웃하던 '계동궁"으로 다시 이어하였으나 왕비와 대비의 완강한 요구에 다시 창덕궁 안으로 환어하는 행로가 이어지게 된다.
<현대사옥>
경우궁,계동궁,관상감 구역은 모두 휘문고등학교 교정으로 편입되었다가 1978년 이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그 자리에는 1983년 현대사옥이 들어서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내에 있던 홍영식 집터, 박규수 집터.제중원터등을 보기위해 헌법재판소엘 들어갔다. 현재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재동 83번지 구역은 1882년 12월 4일 설치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처음 자리했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던 시기인 1910년 도렴동에 있던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왔고 1911년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3년 4월에는 지금의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로 재 이전하였다가 1922년 다시 제동 신축교사로 복귀하는 과정을 거쳤다. 해방이후 1945년 정동 1-8번지에 있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의 옛터로 학교를 이전하였는데 이것이 곧 '경기여고'이다. 한편 경기여고가 떠난 재동 학교에는 1949년 창덕여자중학교가 옮겨오게 되는데 이 학교는 나중에 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가 창덕여고가 학교를 이전한 뒤에 이곳에는 1993년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돌아 간 후 홍영식의 집터는 새로 만들어진 재중원(광혜원)으로 전환되었는데 이 병원은 2년만인 1887년 초에 구리게(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동쪽구역)쪽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4년 남대문밖에 새병원을 지어 옮겨가는데 그것이 곧 세브란스병원이다. 헌법재판소의 북서쪽 모서리에는 천연기념물 제8호인 '백송(白松)' 한그루가 서 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구내에 포함되어 있으나 원래 지번도 다른 전혀 별개의 구역이었으며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집이 있던 자리이다. 그리고 이곳과 바로 이웃하여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기도 한 그의 사랑방에는 젊은 양반자재들이 모여 개화사상을 익히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정독도서관입구에 있는 여러개의 표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김옥균의 집터와 서재필의 집터가 있던 정독도서관안으로 들어 간다.
종친부앞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자리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살던 집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아직도 경기고등학교 자리로 많이 기억되는 화동 1번지의 정독도서관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이다. 그의 집은 정문을 들어서는 부근에 자리하였고 그 안쪽에는 서제필의 집도 잇달아 있었다고 전한다.1900년 관립중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1906년 9월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원래 본관이 있던 자리의 후면에는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의 집이 있었으나 학교부지확장을 위해 1918년 환지조건으로 그 집터를 사들여 평탄작업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이 학교의 개교 당시 3천평의 면적이었던 것이 1만1천여평이 달하는 넓은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학교 건물은 1938년 신축한 것이며 해방 이후 경기고등학교로 존속하다가 1976년 강남으로 학교를 이전한 뒤에는 정독도서관으로 전화하여 사용되고 있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조선후기
종친이란 국왕의 친가 쪽 친척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정식 부인에게서 난 자손은 4대손까지,후궁에게서 난 자손은 3대손까지 종친으로 대우하였다. 종친부는 종친과 관련된 일들을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으며 국왕들의 족보와 초상화를 관리하는 일도 담당하였다.원래 종친부는 경북궁 동쪽 문인 건춘문의 맞은 편에 있었는데 이는 건춘문이 왕족과 외가의 친척, 상궁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1981년 이곳 정독도서관 안으로 옮겨졌다.
이상재집터,손병희선생집터가 있던 가회동주민센터와 북촌미술관앞에서 비스킷 나눠먹고 있는 재밌는 의자에서 인증샷!
보수중인 가회동 김형태 가옥(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30호)을 지나서....
이 집은 1938년 지어진 집이다.1999년 가회동 길 확장으로 대지의 일부가 잘려 나가고 높은 축대가 만들어졌다.
취운정터로 올라 가는 길은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끝자락의 언덕 위에 있는 감사원 일대은 예전에 취운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안국동과 재동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개화당의 주역들이 갑신정변을 도모하기 위한 회합장소로도 자주 이용되었던 공간이라 한다. 하여 일행들은 이곳을 오르느라 다들 헉헉대었다. 언덕을 오르며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간판을 내 걸은 한옥치과병원이 있었다. 1926년 6월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왕실의 장례)일에 우연히 찍힌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간판이다. 1907년 순종원년 종로에서 잇방을 개설한 최승용이란 사람이 사진 속에 있는 "이해 박는 집"이라는 간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국병사들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던 일본공사 일행과 김옥균 등 개화당 세력이 창덕궁후원의 뒤를 돌아 이곳 취운정으로 빠져 나온 다음 일본공사관으로 복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그리고 이 취운정은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유길준이 요주의 인물로 간주되어 추포되자 당시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도움으로 풀려나 이곳에서 연금상태(1885년 12월~1892년 11월)에 들어갔는데 이를 계기로 이곳에서 『서유견문』을 집필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1889년 완성되어 그 후1895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중앙 중,고등학교후문을 들어서 창덕궁 후원뒷길을 걸어 성균관대학을 가로 지르는 길을 걸었다.일본공사가 이끄는 일본군대가 도피할 때에 퇴각로로 이용된 곳이 창덕궁 후원 뒷산길이다.뜻밖의 숲속길을 걷게되니 다들 지금과는 달리 좋다좋다~!라는 말을 하게된다.집터만 무수히 보던 도시의 포장길을 걷다가 이런 후미진 길을 만나니 좋은 것이다.
성균관대 교정을 가로질러 우암 송시열의 집터가 있었으며 친필로 새겨진 증주벽립글씨도 보고 이곳에 고종대에 이르러 북묘가 만들어졌다하여 그 북묘터도 확인할겸 다시 어두워지는 골목골목을 헤집고 명륜동으로 내려 선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명륜동 끝자락에는 북묘가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에 관왕묘가 처음 들어 선 것은 남대문밖에 남묘가 건립된 1598년 일이다. 곧이어 1601년 동대문밖에 동묘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흘러 고종 때에 이르러 두 곳의 관왕묘가 더 만들어졌으니 '북묘'와 '서묘(숭의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곳이 모두 왕실과 무녀가 얽힌 결과물로 창설된 것이라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이곳은 창설직후 그 이듬해에 갑신정변의 와중에 국왕와 왕비의 피신처가 되는 한편 고종을 따라나선 홍영식과 박영교, 그리고 7명의 생도가 정변에 실패한 댓가로 한꺼번에 참살당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 당시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고종이 몸소 겪은 일을 담아 손수비문을 짓고 민영환에세 글씨를 쓰게 하여 '북묘비'를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7년이었다. 이 비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증주벽립" 바위글씨(명륜동 1가 5-99호)
북묘가 있던 자리에 원래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집이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지명으로 명륜동 일대를 일컬어 '송동'이라고 한것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증주벽립'이라고 새긴 송시열의 친필이 바위글씨로 남아 있어서 이곳이 그의 집터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글은 '증자와 주자의 뜻을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이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라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낸 말이다.
오후 5시30분...
사위는 어두워지고 예정시간을 넘겨 답사를 마감했다. 은근히 추운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운 회원들....
일부는 광장시장 빈대떡과 막걸리로 뒷풀이를 하기위해 떠났고 혜화동로터리까지 걸어서 집으로 가는 회원들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다. 1회,2회의 답사를 함께 하지 못한게 못내 아쉬우나 내년 봄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한번 더 하겠다하니 그때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따라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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