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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답사

독립과 민주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답사

다보등 2011. 11. 23. 12:44

독립과 민주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답사

 

 

 

2011년 11월 19일(토)

요며칠 남부지방엔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은 비답지 않은 비가 내렸었다.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토요일 오후...친구랑 둘이서 서대문쪽으로 답사겸 걷기에 나섰다. 서울에 살면서도 그저 지나치기는 해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지 못한 곳을 두군데 돌아 보았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지금은 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독립문과 역사관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서대문 형무소....흔히 드라마상에서 악명높게 표현되었던 서대문형무소...멀찌감치서 붉은 벽돌담만 보아도 침울해지는 마음이 날씨만큼이나 우울했다. 두어시간 천천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땐 하늘이 맑게 개여있었다. 역사관을 둘러보는 내내 참으로 우울했었는데 햇볕이 눈부신 밝게 갠 밖으로 나오니 흡사 내가 감방에서 출소라도 한듯한 개운한 마음이었다.

 

 

 

 

 

 

 

 

 

 

 

 

 

 

 

 망루의자(일제강점기)

망루에서 근무하였던 간수가 수감자 감시를 위해 근무할 때 앉아 있었던 의자

 

 

 

 

용수(1940년대)

수감자 이송 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 2008년 발굴

 

 

 

 

 

역사전시관을 둘러 보다보면 독립운동가의 기록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5천여장의 수형 기록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되새겨 보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수형기록표는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그 원본은 동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다한다.

 

 

 

 

 

 

전시관에는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이 있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 수백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산화하였으며 해방 후 독재 정권기 민주화 운동가들이 희생당한 곳이기도 하다.

 

 

 

 

지하 고문실입구의 일본인 간수모형...

이곳에서 물고문,손톱찌르기 고문(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방법),벽관고문(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 벽면에 서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붙였다.)

일제시대 서대문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은 당하였던 생존자들의 육성증언을 들으며 온 몸이 경직되는 고통을 느꼈다.

 

 

 

한센병환자를 따로 격리수용하였던 한센병사. 1923년 지은 격리옥사이다. 건물 내부 전면에 복도가 있고, 그 후면에 작은 감방 2개와 큰 감방 1개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난방이 되지 않았던 다른 옥사와 달리 오른쪽 중앙 하단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사는 1923년 제 10.11.12옥사와 연결하여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신축되었던 2층건물이다. 1층은 간수들의 사무공간으로 이용되었고 간수들은 이곳을 통해 옥사로 출입하였다. 2층은 전체 공간을 강당으로 꾸며 수감자들의 교회당 즉 전향교육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천장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감시를 하고 있는 간수는 모형이지만 섬뜩하다. 감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긴 복도 역시 섬뜩하다.

 

 

 

 

 

 

김광섭 「나의 옥창일기」

기상 나팔소리에 뛰어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중략)...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무명 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떡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듯 찬바람을 훅 느끼며 창창한 대한천(大寒天)에 뛰어든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요, 아~~하는 것은 입에 문것도 없다는 증거이다. 감방과 공장 사이로 조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다니다간 벼락이 떨어진다.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포기 없는 감옥마당에 뙤약볕에 내리쪼이고 주황빛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라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한용운 「눈 오는 밤」

감옥 주위 사방 산에 눈이 잔뜩 쌓였는데

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싸늘하네

쇠창살도 꽉 닫히지 않은 틈이 있는 탓에

한 밤중에 어디선가 찬 소리가 들려오네

 

 

타벽 통보법

타벽통보법은 감방 벽을 딱딱 두드려 미리 정해 놓은 암호로 수감자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었을 때 그 옆방에 먼저 수감되었던 김정련 선생이 타벽통보법을 알려 주다가 외곽을 순찰 중이던 간수에게 들키자 김정련 선생이 '똥통'을 뒤집어 엎고 소란을 피워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감방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나무로 만든 통에 볼 일을 해결하였다. 광복이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감방의 외벽을 허물고 화장실을 외부에 매달아 설치하였다. 이것이 1987년 서울 구치소 이전 후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다시 벽돌을 쌓았으나 화장실이 매달여 있었던 부분은 원형 벽돌과 다르게 하얗게 변색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의 외벽에 다른 붉은 벽돌과 달리 하얀색을 띤 부분이 예전 화장실 자리이다.

 

 

 

 

 

 

 

 

  

 

 

 

 

 

 

공작사

수감자들의 노역이 이루어진 공작사라는 건물이 있으며 일제는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의 관용물품을 조달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옷감과 의복이 생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군수용품이 생산되었다. 

벽돌은 마포 공독동의 경성형무소에서 대규모로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생산된 붉은 벽돌은 대부분 형무소 옥사나 관공서 건물에 사용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역시 그 벽돌이 사용되어 수감자들의 노동력으로 지어졌다. 서대문 형무소 벽돌에는 지금도 당시 새겨진 글씨가 선명히 남아 있다.

 

 

 

추모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작품이다.

내부에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되어 있다.

 

 

 

 사형장의 '통곡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되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한편 사형장 안쪽에 같은 시기 식재된 미루나무가 있으나 너무나 억울한 한(限)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구문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시신을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비밀통로이다. 고문 등으로 그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사회적으로 파장이 우려되는 경우,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는 경우 등에 이용되었다. 원래 길이는 약 200m로 바깥과 연결되었으나 해방 직전 일제가 붕괴시켰다. 이것을 지난 1992년 독립공원 조성시 발굴하여 약 40m를 복원하였다.

 

 

격벽장

일제강점기 수감자들이 운동 시 서로 대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격벽을 설치하여 각 공간 안에서 운동하게 만들었던 부채골 모양의 운동장 시설

 

 

 

 

 

 

 

 찾아 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출구(전화 : (02) 360-85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