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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해가지는 마을길' 본문
강화나들길 '해가지는 마을길' & '능묘가는 길'
제주 올레, 지리산 둘레길처럼 강화도는 '나들길'이다. 사람과 새들이 날고 드는 길이라는 뜻도 있고 가족들이 나들이 온다는 뜻도 있단다.
우리땅 걷기 2013년 프로젝트인 한강 1300리 길의 마지막 구간을 마무리하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강화나들길 중 3구간 능묘가는길 일부와 4구간 해가 지는 마을길 일부구간을 걸었다. 그 길위에 있는 이건창묘와 정재두묘,고려시대 능 등을 답사하였다.
이건창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구한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재 이건창 선생 묘소이다.
선생은 병인양요 때 순국하신 충정공 이시원선생의 손자로 1852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재, 당호는 명미당으로 1867년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엿으며 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름을 떨쳤으며 24세에 충정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문제학, 함흥부의 안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이 있자 이를 반대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재야에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1898년 5월18일 47세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히셨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당의통략>, <독역수기> 등이 전한다.
이건창, 타계한지 110년이 넘었다.
그의 묘소엔 묘비조차 없다.
건평나루
정제두 묘/인천시 기념물 제56호
하곡 정 제두(1649~1736)선생은 조선 영조대의 학자로 18세기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써 "강화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현종9년(1668)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을 세웠다.
문집으로 <하곡문집>과 저서로 <존언>, <논어해> 등이 있다.
강화능내리석실분/인천시 기념물 제28호
고려시대 무덤이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가릉/사적 제370호
고려 24대 원종(1259~1274)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써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 31년(1244) 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문인석의 몽골식 모자가 이채롭다.
연미정/유형문화재 제24호
월곶리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물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는 곶으로 옛날에는 서해로 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1244년 왕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면학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후 영조 20년(1744)에 중건되었고,1891년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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