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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입성 - 막고굴이 간직한 혜초스님의 흔적

다보등 2017. 6. 19. 21:08

둔황입성- 막고굴이 간직한 혜초스님의 흔적

 

 

 

 

 

2014년 7월 28일

어제 아침 시안역을 출발한 기차는 하루종일 밤새달려 다음날 오전 9시 20분 둔황역에 도착을 하였다. 23시간을 달려 온 것이다.비행기로는 두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란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는 또 이런 기차여행을 따라 올 수 없지. 조금은 불편하고 느리지만 말이다.

기차에서 내리며 느끼는 둔황의 날씨는 그다지 덥지 않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수 없어 당장에 투어버스를 타고 막고굴로 직행한다.

이 곳의 유명 관광지중 명사산과 월아천은 전국 40대 관광명승지의 하나로 꼽힌다. 둔황의 명승유적 가운데 단연 백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이다. 한국문화유산인 혜초스님이 남기신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표 사는데만 30분이 걸렸다. 입장료는 160위안(한화로 약 27,000원)이다. 입장권을 받아 들고 들뜬 기분으로 입장을 한다. 막고굴 관람루트가 있는지라 처음엔 16-17굴부터 관람이다.  굴안으로 들어서면 문화 해설사가 있어 일일이 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중국어로 하는 설명은 하나마나인지라 혹시 한국어 해설사는 없는지 물어 보았다. 불행하게도 마침 한국어 해설사가 오늘 쉬는 날이란다. 뭥미?? 아니 그럼 한국어 해설사가 한 명뿐이란 말인가?

 

 

 

와불이 있는 둔황 막고굴의 석굴들. 다양한 형태의 석굴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이어져있다. 둔황 막고굴은 수백개의 석굴로 이루어진 곳이지만 실제로 관광객이 들어 가 볼 수 있는 굴은 5~10개의 굴만 들어갈 수 있다.그러나 워낙 많은 굴이 있고 내부에 많은 벽화들이 있었던 탓에 보고는 왔으나 뭐가뭔지 잘 모를 지경이다.

 

 

 

 

목조건물처럼 기와지붕이 있는 출입문이 있고 입구가 3칸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큰 석굴이다. 위쪽에는 큰 벽화가 남아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막고굴이 간직한 한국 문화유산에 있다. 신라승 혜초가 남긴 불후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된 사실이다. 1908년 베트남 하노이에 와 있던 펠리오는 이 굴에 소장된 사경류 1,500여 종을 헐값에 사들였는데 그 속에 이 여행기가 들어 있었다. 여행기는 한 권의 두루마리 필사본으로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간 총 227행의 절략 잔간이다.이 국보급 진서는 후손들의 불초로 오늘날까지 90년 넘게 연고도 없는 낯선 땅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유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도 남들보다 뒤져 있으며 해명하지 못한 점들도 적지않다.

 

 

 

 

 

 

 

 

 

둔황 막고굴을 대표하는 북대불. 정면에서 보면 누각이 10층 이상으로 보인다. 이곳 내부에는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내부 사진은 촬영금지인지라 눈에 담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석굴문물 보존연구소'모형관 안애 있는 285호 굴의 대형 불상

 

 

 

 

막고굴은 4세기 중엽 전진 시대에 약준이라는 승려가 처음 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까지 1천여 년 동안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전체 석굴 안에는 4,400여 구의 소상과 연면적 약 4,500평방미터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미터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상이나 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이른바 '둔황문서'다. 한문,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 점이나 된다. 불교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심지어 사원의 경영 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문서도 있다.

 

 

 

 

1899년 헝가리 지질학자 로치가 처음으로 막고굴을 탐방한 이래 숱한 이방인들이 탐험이라는 이름 아래 이 비장의 보물고에 앞 다퉈 모여들었다. 더러는 순수한 탐험심에서 왔지만 대부분 편취자의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행각을 벌였다.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은 석굴의 주지인 왕원록 도사를 꾀어 사정류 20상자와 회화류 5상자를 마제은(말굽모양의 중국 은화) 40닢과 바꾸어 런던으로 보냈다.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 역시 왕 도사를 매수해 사경류 1,500여 권이 든 24개의 상자와 회화.직물류 5상자를 헐값에 사들여 프랑스로 직송했다. 뒤이어 약삭빠른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왕 도사가 숨긴 잔여 문서 중 500여 권의 사본을 챙겨갔다. 러시아의 고고학자, 미국의 고고학자도 한달음에 달려와 같은 수법으로 각각 벽화 10장과 20여 장을 뜯어 갔다. 무모한 외국 편취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긴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둔황 시가지에 있는 우리의 숙소는 깨끗하고 넓직한 방이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점심은 방에서 누룽지로 해결하고 밀린 빨래도 하며 잠시 쉬었다.

오후 3시반에 다함께 월아천이 있는 명사산으로 갈 예정이다. 모래가 윙윙 운다는 명사산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도 2천여 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은 오아시스의 연못, 초승달 모양을 닮아 월아천으로 불린다는 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