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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 고분군 & 공산성 본문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 고분군 & 공주공산성
공주한옥마을에서 뜨끈한 구들장에 하룻밤 지지고 나니 다들 산후조리나 한듯이 얼굴들이 부었다.ㅋㅋ
황태콩나물국밥으로 시원한 아침을 먹고 송산리고분군 즉 무령왕릉으로 오늘의 첫 일정을 시작하였다.
공주한옥마을에서 몇분 걸리지도 않는 가까운 거리이다.
송산리 고분군은 총 7개로 구성되는데 1~6호 고분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도굴)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실로 우연이었다. 비가 많이 와서 5호분과 6호분 사이에 자꾸 물이 스며 드는 것을 막기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기에 천년 넘게 그 어떤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매장 당시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양식을 많이 따라한 형태라 그 당시 교류 수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던 무령왕릉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지만 졸속 발굴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흑역사를 남겼다.
공주송산리 고분군
고분군 보존상의 문제로 1997년 7월 15일 문화재청의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내부관람이 중지되었다.
대신 모형관에서 실물(1:1)과 같은 고분모형을 관람할 수 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의 명문을 통해 무령왕릉인 것이 확인되었다. <일본서기>에 등장한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로, 묘지석을 통해 이곳이 무령왕릉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숱한 고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순간이다.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무령왕릉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서로 사진을 찍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이내 차례대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게끔 신사협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약속을 지켜지지 않았고 한 기자의 발에 숟가락이 부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제대로 된 조사는 해보지도 못한 채 고분을 연지 하루도 안되어 유물을 수습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공주 공산성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475~538)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총 길이 2,660미터, 해발 110미터의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공산성은 건축물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송산리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공산성 성벽따라 줄지어 있는 깃발이 눈에 띄는데 이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깃발의 바탕색이 황색인데 이것은 백제의 나라 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공산성을 둘러 볼때 휘날리는 백제 깃발도 눈여겨 보면서 어떤 모습인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배다리 흔적, 금강철교
우리가 갔던 지난 4월 첫째날, 공산성에 벚꽃이 피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공주를 다녀 온지 이틀인가?
언제 피나 싶었던 우리동네 벚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 공산성의 벚꽃도 만개했겠다~^^
서문에서 바라 본 공주시가지
백제시대 때 왕궁터로 추정되는 왕궁지가 넓게 펼쳐진다. 공주 시가지와 금강, 송산리 고분군이 조망되는 곳에 있는 백제 왕궁지는 큰 건물터와 왕궁 내에서 발견된 인공연못인 연못터, 식품이나 물품등을 저장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인 목곽고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조사를 통해 확인된 건물지와 연못 안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삼족토기, 그릇받침, 토기와 기와편은 당시 백제 왕실의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공산성 쌍수정(문화재자료 제49호)
1734년 (영조10)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인절미의 고향 공주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지게 잘라 콩고물을 무쳐 먹는 떡이다. 그런데 왜 인절미라 불렀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 잠시 공주에 피난 온 적이 있었다.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개를 먹더니
"맛이 있구나. 그런데 떡은 떡인 모양인데, 대체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떡 이름이 있을 텐데 아무도 모르니. 그것참 기이한 일이오. 근데 이 떡은 어느 집에서 만들어 왔소?"
"임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했습니다."
왕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임씨라...임씨라...그것 참 맛이 절미로다"
그리하여 임씨가 진상했다하여 이때부터 임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이 되었다.
아하~!!
인절미가 공주떡이로구나~~!!ㅎㅎ
현호색▼
괭이눈▼
활쏘기체험장
흐린듯한 날이었으나 기온이 따뜻하여 백제에서 조선으로 이어져온 아름다운 성곽 길을 걸어봄직 하건만...
걷는데 무리가 있는 일행이 있는지라...아쉬운 마음으로 돌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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