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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1871-190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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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1871-1900)

다보등 2023. 2. 6. 17:25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메리 메콜리프 지음/ 최 애리 옮김

 

 

벨 에포크와 에콜 드 파리 : 1871~ 1914년 사이 프랑스 예술이 시각적, 문화적 격변기를 지칭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 벨 에포크. '빛의 도시 파리'를 더욱 아름답게 밝혔던 예술가들의 이야기.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르느와르, 모딜리아니, 피카소,  에펠, 베르트 모리조, 위구스트 로댕, 클로드 드뷔시, 사라 베르나르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모두 파리를 거점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하며 재능을 꽃피웠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당시 프랑스 정치 경제 상황과 맞물리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20세기 초 전 유럽과 세계에서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든다. 이들을 '에콜 드 파리'라 통칭한다. 아방가르드의 시초이다.

오늘날 파리는 예술과 패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메카로서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이 매력은 벨 에포크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클로드) 모네를 만났는데, 완전히 파산했더군." 1875년 여름, 에두아르 마네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실제로 모네는 자기 그림 중 "아무거나 골라" 열 점을 단돈 1천 프랑에 팔겠다고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저께 이후로 무일푼입니다."
그는 마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정육점에서도 빵집에서도 이제는 외상을 주지 않아요." /114

벌써 한 달째, 저는 물감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치 않아요.(......) 아내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편안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윳돈이 있을만한 누구에게나 구차하게 편지를 써댔다.
유산은 탕진하고 재정적인 곤란을 겪었다.
클로드 모네와 그의 곤궁한 동료들에게는 불운하게도 1876년 4월에 열린 두 번째 인상파전도 첫 번째 때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모네는 4월 전시회에 출품했던 열여덟 점 가운데 단 한 점을 팔았지만 다행히도 좋은 값에 팔았다./116

에밀 졸라는 수줍고 말수가 적은 남자이다. 사실 그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허락하는 약점은 탐식이었고, 그는 잘 먹었다. 
"졸라 혼자서 보통 소설가 세 몫은 먹는다네!" 모파상은 졸라가 메당에 새로 산 시골집에 다녀와서 이렇게 썼다.
(......)
졸라의 허리둘레가 늘어나는 것은 술이 아니라 음식 때문이었다. 그의 소설 <목로주점>에서는 알코올과 음주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자신은 술을 절제하는 편이었다. <목로주점>은 분명 알코올 찬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금주 협회의 
전단도 아니었다. 그것은 졸라가 강력하게 주장하듯이 "진실에 관한 작품"이었다. '목로주점'이란 졸라로 인해 유명해지기
전에는 잘 쓰이지 않던 속어로, '궁둥이'라는 뜻도, '싸구려 선술집'이라는 뜻도 될 수 있었다. /139

로댕의 작업 방식은 확실히 남달랐던 모양이다. 조각가로서의 경력 초기부터 그는 누드모델들이 아틀리에를 돌아다니거나
휴식을 취하는 대가로 돈을 주었다. 분명 그들을 계속 관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고대 그리스인들만큼이나 
인간의 몸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는 "움직이는 근육들의 모습에 친숙해"졌고, 이것이 그의 조각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 "나는 매사에 자연을 따르네."

" 절대 자연에게 명령하려 하지 않지." /165

에두아르 마네 역시 성공을 갈망했다. 하지만, 연거푸 살롱전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그는 자기 식대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 살롱의 심사 위원들은 마네가 화류계 여성을 그린 <올랭피아>나 벌거벗은 여자가 제대로 차려입은 두 남자 사이에 무심하게 앉아 있는 <풀밭 위의 점심>에 대해, 그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에 거품을 물었을 뿐 아니라 예술적 관례와 전통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공격에 대해서도 맹렬히 비판했다. 살롱은 이런 센세이셔녈한 그림들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묘사한 <빨래>(1875)마저 대번에 거부했다. /168

1883년은 장례의 해였다. 우선 1월에는 강베타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 5월에는 빅코르 위고의 헌신적인 애인이었던 쥘리 에트 드루에가 죽었는데, 위고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사이에 에두아르 마네도 세상을 떠났다. (......) 장례를 마친 후, 마네의 어머니는 베르트와 외젠의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 베르트 모리조는 시어머니와 편한 사이가 못 되었고, 특히 마담 마네가 모리조의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마뜩잖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모리조는 점차 화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다른 가족과도 어려움을 겪었다. 남동생 티뷔르스는 그녀가 쥘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이 부당한 비난은 모리조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또 그리 친하지 않았던 큰언니 이브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얼음 같은 장벽"이 있다고 불평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언니 에드마까지도 전에는 그렇게 가까웠는데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대체로 그 모든 불만은 베르트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바쳐 그림에 몰두하게 된 결과였다./218-219

고군분투하던 젊은 화가 로돌프 살리가 1881년에 '샤 뉴아르 <검은 고양이>'를 열었을 때, 그는 자신이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이 누추한 야간 업소는 몽마르트르 언덕 밑자락, 로슈슈아르 대로(18구)에 있었는데, 당시에도 그곳은 좋은 동네가 아니었다. 하지만 살리의 동업자이던 시인 에밀 구도가 소문을 내준 덕에 얼마 안 가 시인, 음악가, 화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샤 누아르는 피갈 한복판에 위치한 데다 테오필 스탱랑이 그린 포스터에는 호색적으로 보이는 수고양이가 벽 위에 올라가 있지만, 매음굴 같은 곳은 전혀 아니었다. 샤 누아르의 손님들은 물론 즐기러 오는 것이었으나, 그들이 즐긴다는 것은 지적. 문화적 관심사를 공유하며 약간의 주흥을 곁들이는 유쾌한 저녁을 뜻했다./265-263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꽃이 될 특별한 구조물 - 귀스타브 에펠의 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1887년 1월에 에펠탑 공사는 우선 아래로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부르데가 세련된 심미주의에 집착하느라 간과하고 말았던, 필수적인 단계였다. 탑의 네발 중 둘은 센강에서 가까운 불안정한 지반에 두어야 했으므로, 에펠은 단단한 점토층이 나올 때까지 15미터 시추했다. 그리고는 전등을 켠 잠함을 밀봉하여 21미터, 즉 수면 아래까지 내려보냈고, 인부들은 압축공기를 마시며 굴착 작업을 했다. 이런 작업 방식은 그가 이미 교량 건설에서 성공적으로 시혐해 본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대한 주추들이 제자리에 놓이고 역시 거대한 앵커볼트들이 조여진 다음 - 이 기초공사에만 다섯 달 이상이 걸렸다. 에펠은 비로소 위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탑 공사가 시작된 직후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샤를 가르니에를 위시한 파리의 많은 유지들은 이 '괴물'이 경관을 망치게 되리라는 생각에 경악했다.(......) "쓸모없고 흉측한 에필탑"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경고를 보냈다. /303

1889년 5월 박람회 개막에 맞추어 그 대대적인 과업을 완성한 에펠은 아직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도 전에(엘리베이터들은 공사에 그 나름의 난관이 있어, 탑이 공개된 후 여러 주 만에 완성되었다.) 탑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방문객의 물결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박람회 동안 200만 명이 탑을 방문했으며, 가장 격렬히 반대하던 예술가들 조차 그 성과에 승복했다./313

수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에펠탑은 파리의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1위가 되었다.

1888년 초 블랑제 위기가 한창 달구어지던 무렵, 그리고 귀스타브 에펠이 파나마운하 구하기에 나서던 무렵,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을 향했다. 그는 파리에서 2년을 지내며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고 예술가들의 분방한 삶에 어울리느라 완전히 지쳐버린 터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거듭되는 초대를 받아들여 폴 고갱 또한 아를로 - 가구라고는 거의 없는 노란 집, 반 고흐가 해바라기 그림으로 꾸며놓은 집으로 -  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불운하게도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자는 이 실험은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12월 중순에 고갱은 테오에게 "빈센트와 나는 기질이 워낙 맞지 않기 때문에, 함께 지내며 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썼다. 빈센트도 그림에 대해 싸우다 보면 "머리가 다 쓴 건전지처럼 닳아버린다."라고 했다.
종말을 가져온 것은 12월 말, 반 고흐가 면도칼을 자기 귀에 들이댄 그 유명한 사건이었다. 고갱은 서둘러 떠났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이후 편지는 주고받았지만,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307- 308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은 '컴퓨터 빼고 다 나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급변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명을 만끽하며 풍요로운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근심 없이 행복했던 이 시기를 '벨 에포크'라 부르며 회상했다. 불어로 아름다운 시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