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돼지 덕분에 칙간은 오히려 악취 없이 청결했다고 본문
며칠 전 티벗인 나미님의 제주 관련 포스팅에 추사 김정희 유적지에서 찍은 돗통시 사진을 보고 근래에 읽었던 소설 속에서 돼지칙간에 대한 글이 있던 게 생각이 나서 책을 찾아보았다.
예전에 제주도의 주거공간 중 한 곳으로 '돗통시'가 있었다. '돗'은 돼지의 제주방언으로 도새기와 화장실을 뜻하는 통시가 결합되어 돗통시라 불린다.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 놓은 공간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람이 똥 누는데 웬 돼지냐고?
현기영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작가의 고향인 제주도 '돗통시'에 관한 웃픈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작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우물에 간 어머니가 어둑새벽에 우물 가에 쓰러져 있던 취객을 보고 죽은 사람인 줄 알고 크게 놀란 적이 있어, 그 충격으로 몸져누웠는데 속이 허하면 헛 것이 잘 보인다고 허한 속을 달래주어야 한다며, 외할아버지가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보냈다. 약이니까 자식들 눈치 보지 말고 혼자 먹으라는 엄명이었지만, 어머니는 아귀 같은 자식들을 두고 그 고기를 혼자 먹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 돼지고기의 절반은 우리 오누이 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꿀 바른 돼지고기 편육,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약이 또 있을까, 혓바닥이 다 녹는 듯한 그 기막힌 맛이라니!'
얼마나 궁핍한 시절이었으면, 돼지고기 한 근이 약으로 쓰였을까.
특히 허기증이 심한 임산부들일수록 제 정신이 아니어서, 고기를 먹고 싶어 안달한 나머지 칙간에서 똥누다 말고 돼지털을 뽑아다 불에 태워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다.
독자들 중에는 사람이 똥누는 데 웬 돼지냐고 의아해할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당시 그 섬 고장에서는 집 울타리의 한 귀퉁이에 돼지울을 만들고 그 한 귀퉁이에 칙간을 마련하여 인분으로 돼지를 키우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자. 돼지 덕분에 칙간은 오히려 악취 없이 청결하지 않았던가. 고교 졸업 후, 서울생활을 시작할 무렵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들 중의 하나가 그곳의 변소였다. 좁고 어둡고 악취 진동하는 그 닫힌 공간에 들어가 쪼그려 앉자면, 발밑에 컴컴하게 아가리 벌린 똥통이 끔찍했고 거기서 올라오는 악취 또한 어찌나 골 때리는지, 정말 협소공포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것과 비교할 때 , 그 섬 고장의 칙간은 너무도 마음이 편한 곳이었다. 말이 칙간이지, 그것은 벽도 지붕도 없이 한데에 디딤돌 두 장을 걸쳐놓고, 돌 몇 덩이로 앞만 가린 것에 불과했다. 밝은 햇빛 속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방분한다는 것은 얼마나 쾌적한 일이었던가.
(......)
밤중에 누는 똥은 밤똥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배변이 불규칙해서 종종 밤똥을 눠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의 칙간이 무서워 쩔쩔매곤 했다. 칙간에는 칙귀라는 귀신이 있었다. 그놈이 얼쩡거리지 못하게 연상 침을 퉤퉤 뱉어야 했는데 그때 내 벗이 되어 칙귀를 물리쳐주는 것이 바로 칙간 안의 돼지였다. 퉤퉤 침 뱉는 소리에 잠 깬 돼지가 어둠 속에서 꿀꿀거리며 마중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금방 두려움이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돼지는 칙간을 깨끗이 청소해 주고, 좋은 거름을 줄 뿐만 아니라 고기맛도 유별나게 좋아서 아주 소중한 가축이었다. 고기맛이 좋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인분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비계가 적어 졸깃졸깃하고 맛이 짙었는데, 그 특이한 감칠맛을 먹어본 사람은 아직도 혀끝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배고픈 시절의 입맛이라 더욱 그랬으리라.
30∼40년 전까지 '돗통시'라고 하는 돌담으로 두른 변소에서 길러지면서 청소부(?) 역할을 도맡아 '똥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던 제주흑돼지는 유명하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물이 부족하고 토양이 척박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힘들어 '돗통시'가 생겨났다. 돼지는 청소도 해주고 좋은 거름을 줄 뿐만 아니라 고기맛도 유별나게 좋다고 하는데 지역 특성상 삶의 지혜가 깃든 주거공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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