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오래된 정원 /황석영 장편소설 본문
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인 1962년 단편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하였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저서로는 소설집 <삼포 가는 길>, <객지>,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심판의 집>, <가객>, 장편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 <바리데기>, <해질 무렵>, 광주항쟁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을 간행하였다. 200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올해의 예술상을, 2018년 <해질 무렵>으로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수여하는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오래된 정원>
해방 전후의 혼란, 군부 독재, 6월 항쟁, 동구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술하며 혼란을 겪은 과거의 세대와, 이제 그 시기를 지나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갈등과 화해가 모색된다. 한윤희 아버지와 한윤희의 관계는 오현우와 (한윤희 사이에서 낳은) 딸 은결의 관계로 대물림되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 보인다. 또한 제목 '오래된 정원'은 오현우와 한윤희가 동거한 갈뫼의 시골집인 동시에 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갈뫼는 삼포 가는 길의 삼포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없는 동네다)
소설의 주된 배경은 1980년 대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겪고 수배자가 된 주인공 오현우는 자신의 은거를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좌익 지식인 아버지를 둔 한윤희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상세히 묘사했다. 18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온 오현우는 한윤희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는 둘만의 따뜻한 시간을 보냈던 갈뫼를 찾아간다.
한윤희는 오현우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최종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언젠가 감형되어 나올 것을 대비하여 갈뫼 집을 구입하여 그가 오길 기다린다. 한윤희는 살면서 죽을 때까지 쓴 일기를 갈뫼에 보관해 두었고 한윤희의 바람대로 오현우가 갈뫼로 돌아왔다.
소설은 오현우가 18년의 옥살이에서 석방된 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권)
저 안에서두 한 선생 소식 들은 적 없지?
처음에는 누님이 누구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한 선생...... 누구 말예요?
한, 윤, 희. 잊어버렸니?
가슴이 얼어붙듯이 움찍하더니 따뜻한 물이 서서히 발끝에서 차오를 때처럼 팔다리가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아, 나는 잊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다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슨 나쁜 소식은 아닌가 하여.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네의 마지막 편지를 영치당한 것도 벌써 십일 년 전의 일이 아닌가. / 28
다리를 건너서 산굽이를 돌아나가자마자 두 산자락 사이에 가려 있던 시야가 한꺼번에 확 트였다. 마치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양편으로 벌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은 둥그런 산이 정면에 보였고 그 남향받이에 집 몇 채가 띄엄띄엄 안겨 있었다. 길의 바깥쪽에서는 다리 건너 비좁은 산길 안에 이런 동네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앞의 완만한 경사지에 과수원이 보였다. 계곡의 지류인 개천이 산에서 천천히 흘러내려오고 개천가에는 초가로 지붕을 이은 물레방앗간도 있고 과수원 너머 뒤편에는 짙푸른 대숲이 있었다. 이제 막 봄의 문턱이라 포근하고 흙냄새 풍기는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까치 한쌍이 말라붙은 열매 몇 개를 매단 가지뿐인 감나무 끝을 오르내리며 쾌활하게 우짖었다. 윤희는 바람의 맛을 보려는 것처럼 흐음, 하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여기가 갈뫼예요. /61
닭울음소리가 길게 끌면서 시작되더니 근처의 닭들이 모두 경쟁이라도 하듯이 목청을 뽑았다. 나는 불을 끄고 누운 채로 뒤쪽 들창문이 밝아오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내 머리맡에는 밥상 위에 그네의 노트가 그대로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윤희의 독백이 깨알 같은 글씨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5
내가 우리말사전을 들추며 골라냈지. 은결이라구. 햇빛에 강물이 반짝이는걸 은결이라고 한다지.(......) 방안은 온통 그 애 물건으로 가득 찼어. /143
(2권)
윤희는 딸의 이야기를 자기 동생에게는 털어놓았으면서도 지난 세월 동안 풍편에라도 나에게 닿는 걸 차단하려고 애썼다. 그건 아마도 갇혀 있는 나에게 정신적으로라도 기대어서는 안 된다는 작심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딸이 있다. 윤희가 세상에 남겨놓은 갈뫼의 아이. /5
은결이가 팔십이 년생이라면 지금은 열여덟 살 먹은 처녀가 되었겠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던 이 세상에 윤희는 그 아이를 남겼다. 나는 갑자기 조바심이 나서 곧 아래로 내려가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은결이가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윤희는 우리들의 딸에게 아빠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어쩌면 아이를 만나서는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타는 듯했다. 나는 윤희가 어째서 저렇게 자기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하여 자세히 적어두고 기억을 되새겼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윤희는 은결이와 내가 이승에서 지어갈 부녀지간의 애증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8
신문 좀 보겠습니다.
손님은 힐끗 눈길만 한번 주고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신문을 집어 오면서 그와는 반대편 자리로 돌아앉았고 탁자 위에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주민등록번호를 쓴 작은 팻말을 들고 찍은 최동우며 건이며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
아래쪽에서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내 사진을 알아보게 되었다. 나는 잠깐 놀라서 숨을 들이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각기 음식을 먹느라고 내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진은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주민등록에 썼던 옛날 사진이었다. 머리도 길고 볼이 움푹 패였고 훨씬 어수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 도표에 의하면 내가 조직책으로 되어 있었고 주범이었다. /88
나 신문 봤어요.
학교에서 우연히 봤는데......
하는 수 없이 나도 말했다. 나두 봤어. 읍내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으러 갔다가. (......)
다 잡혀갔는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내가 나타나야 다른 사람들도 편해질 거야. /100
어머니가 봉지 안에서 성냥갑만 하게 붉은 비단으로 감싼 사각형의 카드 같은 물건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이거 지니구 있어라.
이게 뭔데요?
내 원래 이런 걸 믿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무서운 세월이니까......
나는 말없이 붉은 비단의 윗부분을 손톱으로 벌려보았다. 붉은색 물감으로 그린 듯한 관음보살의 입상이 금박으로 그려져 있다.(......)
응, 그건...... 부적이다. /123
당신이 실장이야?
옛, 그렇슴다.
우린 남산에서 왔어요. 얘가 오현우야?
관계서류 다 내놓고... 그동안 뭔가 했겠지요?
기초조사를 대충했습니다.
밖에는 검은 승용차가 시동을 걸어놓은 채로 대기 중이었다. /133
(3권)
언제나 감방에서는 처음이 어려웠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일주일쯤 지나면 아무리 나쁜 상황도 익숙해지고 그럭저럭 지낼 만하게 된다. 하지만 상담이라도 한다고 관구실이나 보안과에 끌려나가게 되어 밝은 햇빛 아래로 걸어가게 되면 그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 우선 징벌 사동에서 마당으로 나서자마자 두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아래 노란빛이 가득 차고 현기증으로 어지러워지면서 비칠거리게 된다. 담당도 그런 꼴을 뻔히 알고 있어서 등을 밀든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냉소한다.
그래, 팔십오 년 가을쯤이었을 거야. 그 전해부터 정치범 장기수들에게도 귀휴와 사회참관이 시작되었으니까. 사회에서의 폭압도 유화국면으로 바뀌었듯이 그 무렵부터 전향제도가 폭력에서 회유로 전환되었다. 선배들은 칠십 년대에 지도를 맡은 폭력배들에게서 고문을 받으며 죽어나갔고 버티던 이들도 여러 사람이 자살했다. 나는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넘어가자마자 먹방에 갇히기도 하고 개밥을 먹기도 하면서 전향공작에 시달렸다. /127
여보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소. 나는 간첩이 아니오.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네가 잘 알지 않소.
종이때기 한 장 가지고 뭘 그래. 눈 딱 감고 지장만 꾹 누르면 대번에 처우가 달라질 텐데.
당신은 정말 그 종이때기 한장 가지고 뭘 그럽니까. 내가 저쪽 사상을 가진 적이 없는데 어디서 어디로 돌아선단 말이오. 오히려 내가 빨갱이라는 걸 인정하고 독재정권의 정치적 조작과 폭력을 기정사실로 해달라 그 얘기요? /128
(4권)
당신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146
그 애는 내가 자기의 아비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채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렇게 나하구 놀아주었으면 했어요.
(......)
가뭇, 하면서 모든 장면이 사라졌다. 고속버스의 차창 밖으로 봄들판이 지나가고 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난 언덕이 천천히 지나갔다. 새잎이 돋아나고 있는지 대지가 연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52
● <오래된 정원>은 같은 이름으로 2007년 영화로 개봉되었다.
감독 - 임상수
출연 - 지진희, 염정아, 윤여정, 반효정 등
(나는 영화 대신 책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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