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부제 :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로운 삶) /향봉 지음 본문
향봉 스님
미륵산 해발 380m 절벽 제비집 같은 사자암에 향봉 스님이 있다. 그는 무리동물인 사자보다는 홀로 살아가는 산중호걸 호랑이에 가깝다. 이 고지에서 스님은 상좌도 공양주도 없이 구름을 벗 삼아 홀로 밥 지어먹고, 글 쓰고, 산책한다.
어린 시절에 백양사로 출가했고, 해인사 선방을 거쳐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지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불교계 '실세'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면에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서, 수필집 「사랑하며 용서하며」가 6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마흔이 다된 늦은 나이에 철이 들어, 인도, 네팔, 티베트, 중국으로 15년의 치열한 구도행을 떠났다. 이후 돌아와 20년째 사자암에 머무르며 머리와 수염이 허연 미륵산의 한가로운 노승으로서 할 일 없이 평화와 자유 누리며 살고 있다.
인생은 나그넷길에서 흔들리고 더러는 방황하며 철이 든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리는 법이다.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을 버릴수록 편안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진리는 멀리 있거나 높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물, 공기, 빨래처럼 널려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가정이 최상의 법당이요, 내 가족이 살아 움직이는 부처이자 보살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오늘은 오늘뿐이다. 영원한 오늘의 참 주인공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날마다 좋은 날로 살 일이다. /여는 글에서
● 베스트셀러 <사랑하며 용서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은 밥이다. 물이다. 공기이다. 크고 작은 사랑 속에서 사람의 키는 자라고 마음은 철이 들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는 설렘만 있는 게 아니다. 눈물도 웃음도 빛도 어둠도 있는 것이다. 하여, 용서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이해와 배려하는 마음이 후회를 줄이게 되는 것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 일이다.
● 돈과의 인연
통장 잔액이 100만원에서 시소게임을 즐기고 있지만, 나는 진정으로 편안하다. 통장이 비어 있어 행복할 리는 없겠지만, 그저 떳떳하고 당당하여 편안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다.(그래도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라면과 커피는 무료 제공한다.)
● 동화 속의 암자
사자암은 해발 380미터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 한 편으로 울타리처럼 버티고 있다. 수령이 몇 백 년이라는 느티나무도 다섯 그루나 법당 뜰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버티고 있다. 법당도 요사채도 종각도 삼성각처럼 규모가 크지 않지만, 그 역할에는 부족함이 없다.
사자암 마당에서 산 아래 환히 트여 있는 세상을 내려다보면, 누구나 마음이 환해져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이 되어 오늘의 주인공임을 깨닫게 된다. 짐승 '사獅'나 스승 '사師'나 중국의 고어에서는 으뜸의 의미를 지닌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사자암 마당은 좁으나 드넓은 시야를 품에 안겨주는 에너지 충만한 도량이다.
낮에는 아름드리 다섯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누구나 쉬게 하고, 밤에는 별빛이 안개꽃처럼 피어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동화 속의 암자이다. ( 동화 속 암자 사자암을 꼭 가보고 싶다.)
● 산골 늙은이의 화려한 점심
별것 아닌 것들의 소소한 행복이 나를 기쁘게 하고 들뜨게 한다. 산이 쩡쩡 울릴 만큼 바위벽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여전(旅錢) 한 닢 마련 없이도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남은 미역국에 밥 말아먹으니 세상이 배 안에 담겨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 누군가 법당의 부처님 앞에 사과 한 알을 놓고 가, 그 사과로 후식까지 즐기고 있으니 이만하면 산골 늙은이의 화려한 점심을 마친 셈이다.
생활이 가난하나 불편하지 않고, 바라는 바가 없으므로 목마름이나 배고픔이 없다. 울고 싶을 때는 잔잔하게 울고 기분 좋은 날엔 유행가도 부른다. 넘침과 부족함 없이 '날마다 좋은 날'의 평화, 행복, 자유를 누리는 오늘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
개구장이 시절의 일화와 출가 직후 에피소드엔 미소가 번지다가도 눈물 한두 방울 적시지 않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글에서는 어느새 가슴이 먹먹하고 절절해진다.
● 동전 열한 개
사자암 삼성각 불전함에 일주일 간격으로 500원짜리 동전이 버티고 있었다.(......)
하루는 산신님께 투덜거리듯 말했다.
"500원 동전으로는 새우깡 한 봉지도 살 수도 없고 붕어빵 한 개라면 모르지만. 아무튼 물가 상승도 고려해 동전 숫자가 늘어나도록 관심 좀 가지세요."
그런데 사자암 주지의 염치도 없는 얼토당토한 주문이 열흘도 안돼 불전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500원 동전이 열한 개나 담겨 웃고 있었던 것이다. 동전 옆에는 한 장의 편지도 놓여 있었는데 철딱서니 없는 사자암 주지를 울리고 만다.(......)
나는 편지와 동전 열한 개를 촛대 사이에 올려놓고 큰절을 하며 그 가족과 딸아이의 건강을 염원하였다.
(일곱살인 딸아이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 걸음걸이 장애로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하고 있단다. 아이엄마가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 사탕이나 과자를 사 오며 (500원)동전을 아이에게 주면 그때마다 아이는 그 동전을 사자암 부처님께 올리라고 주었다. 엊그제는 좋은 사람을 만나 채소 값을 후하게 받았다며 아이한데 동전 열 개를 주었더니 아이는 그 돈에 한 개를 더해 오늘은 동전 열한 개를 올린다는 내용의 편지다.)
● 어느 퇴임 교장의 이야기
스님, 절에서 매일 마당도 쓸고 잡초도 뽑고 허드렛일을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할 터이니 조그만 방 하나를 주어 저를 머물게 해 주십시오, 슬, 담배도 끊고 머슴처럼 열심히 일할 터이니 갈 곳 없는 저를 일꾼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물론 일체의 보수도 바라지 않고 무임금 무보수로 일만 하겠습니다. 마음만 편하면 됩니다. 스님.
● 스님, 저 왔어요
나는 가슴이 멍멍해 속으로 울고 있었다. 내가 쓴 책에 자주 등장하는 '길자년'이 그녀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참, 세상이 지랄같이 허무하구나. (가슴 짠한 소설 같고 드라마 같은 이야기)
● 세상의 주인공은 나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동쪽이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서쪽일까? 누구에게나 묻게 되면 아무나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인다.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동서남북의 중앙에 서 있는 바로 나, 내 자신의 위치로부터 동쪽과 서쪽이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중략)
내가 동서남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나에게는 경계해야 할 변두리와 모서리가 없을 터이다. 좌와 우도 없는 것이다, 우열과 열등도 없는 것이다. 아웃사이더가 아닌 인사이더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된 사람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천하제일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엑스트라가 아니다. 주연 배우이다.
● 안간힘을 다해 쓴 글
내 죽거든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길
관이니 상여니 만들지 말길
그저 입은 옷 그대로 둘둘 말아서 /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버릴 것
한 줌 재도 챙기지 말고 버려버릴 것
내 죽거든 49재다 100재다 제발 없기를
쓰잘 데 없는 일로 힘겨워 말길 / 제삿날이니 생일이니 잊어버릴 것
죽은 자를 위한 그 무엇도 챙기지 말 것
죽은 자의 사진 한 장도 걸어두지 말 것
내 죽어
따스한 봄바람으로 돌아오리니
피고 지는 들꽃무리 속에 돌아오리니
아침에는 햇살처럼 저녁에는 달빛처럼
더러는 눈송이 되어 더러는 빗방울 되어
(마지막 부분은 tvN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던 대사와 흡사하여 드라마 작가가 향봉스님 '내 죽거든' 시를 참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티베트의 '당시옹'이라는 지역에서 고산증세로 쓰러져 죽어 가고 있었다.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흔히 있는 일이라며 병원도 없고 택시도 없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쓴 글이 바로 <내 죽거든>이다.
여행지에서 가장 힘겨운 것은 앓아누워 혼자서 삭임질하는 것이다. 젖은 자리를 피해 옆으로 옮겨 누웠다가 젖은 자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비좁은 싱글침대의 써늘함이 오싹하다. 녹두죽 한 그릇 먹어봤으면, 펄펄 끓는 온돌방에 누워봤으면, 졸아드는 나그네의 푸짐한 생각들이 처량하다. 설핏 잠든 꿈 속에서도 뜨신 잣죽에 쌍화탕 마시며 숯불에 인절미 굽는 냄새도 따라가면서 나그네의 외진 길을 가고 있었다.
● 화 삭이는 방법
화가 목에 까지 차오를 때 할렐루야를 일곱 번쯤 부르던지 관세음보살을 열 번쯤 맘속으로 천천히 불러들이면, 불길같이 타오르던 화도 한 박자 더디어지고 조금은 삭아 내릴 수도 있을 터이다.
싸움은 본시 사소한 티끌 같은 일에서 비롯된다. 내세울 것도 없는 어쭙잖은 자존심을 앞세우며 큰 다툼으로 번지는 것이다. 치약을 쥐어짜는 각기 다른 스타일에서 시비가 오갈 수 있고, 화장실에 걸려 있는 수건의 의치에 따라 큰소리가 터질 수도 있다.
● 바람을 닮은 적멸의 자유인
인도에서 만난 영국인 부부는 아내가 위암 말기로 희망이 없자, 아내가 원하는 인도 여행을 하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난 후 라다트 지방의 '레'라는 도시에서 영국인 부부 중 남자를 만나게 된다. 말기암 치료 중이었던 아내는 다람살라에서 죽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 달라이 라마를 만나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후 남편은 영국행을 접고 티베트불교의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아내와 사별하고 티베트 승려가 된 영국인 남편의 이 이야기는 영화 같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싸우면 이기는 다윗 왕이 언젠가의 패배할 때를 생각해 마음의 좌우명이 필요했다. 금세공을 불러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고, 그 반지에 생명의 말씀을 새겨 넣으라고 명령했다. 금세공이 반지를 만들었으나 그 반지에 새길 좌우명이 될 생명의 말씀을 궁리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금세공이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좋은 말씀을 부탁하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적어주는 것이었다. 반지에 새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를 다윗 왕도 받아들이며 기뻐해 평생을 그 반지를 끼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성격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렇다, 세상을 엮어가다 보면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윗 왕이 되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마음에 되새기며 우월함과 열등함을 덜어내야 한다. 자만은 실패를 불러들이고 상대에 대한 멸시와 무시는 수많은 적을 만들어 어둠으로 몰려오기 때문이다.
● 곁에 있어도 그리운 친구
그러므로 친구다운 친구는 매우 드물다. 있을 때 모이고 없을 때 흩어지는 막걸리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마음 깊은 곳의 뜻을 대화로 눈빛으로 서로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일생에 서넛이다.
● 사라지면 그뿐인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경전 중에 가장 오래전에 결집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사품(蛇品)에 담겨 있는 구절이다.
세상에 떠다니는 크고 작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이고 싶다. 촘촘히 엮어 있는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머묾이 없는 바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팍팍해도 남의 탓이 아닌 내 탓으로 갈무리하며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살고 싶다.
● 글을 쓰게 된 이유
향봉 스님은 불교의 사상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불교가 어제나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의 종교임을 전하고 싶다.
불교는 전생과 내생을 키우지 않는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영원하다. 영원한 오늘의 주인공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 일이다.
향봉스님은 20년 전 사자암에 들어오며 바른 불교 바른 신앙을 새기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애쓴다.
방법은 쉽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연등은 부처님 오신날에만 달고, 사주 관상도 안 보고 49재, 천도재, 입시 기도도 올리지 않는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포기한 거다.
스님의 ‘생활 염불’은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이다.
마찰은 피하고 행복에 이르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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