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 정운 본문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디플롬, 박사)했다.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전공, 2015년 수료했다.
2012년 만 오십이 되던 새해 첫날,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만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랜 꿈이었던 그림을 그리며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이 책은 일본 생활의 시작과 끝을 담은, 지난 4년의 결산이자 격한 외로움의 결실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정말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도 비포장도로를 한두 시간 달리면, 구석구석 정비해야 합니다. 나사가 풀리고 기름이 샙니다. 무쇠로 된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여린 마음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의 험난한 세월을 겨우 버텨왔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 몸과 마음이 정상일 거라는 그 '터무니없는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우리는 너무 바쁘게들 삽니다.그렇게 사는 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착각입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형편없이 망가진 내 자신을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꾸 그러는 겁니다. 아무리 먹고살기 바빠도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격하게 외로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들 아주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광고처럼 '외계인의 침공이 없다면, 혹은 빙하기가 다시 도래하지 않는다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세까지 살게 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먹고 살 돈이 있다고 내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은퇴한 후에도 30~40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소외감 느끼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끝까지 잘 버틸 자신 있나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서워 외로운 시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겁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 가능합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겁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더 자도 된다. 조간신문은 좀 더 있어야 온다
노력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충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작은 성공을 '열씨미'만으로 설명하지는 말자는 거다. '열씨미의 통제 강박'에 빠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아야 성공한 삶이다. 잠 푹 자고, 많이 웃는 삶이 진짜 성공이다.
하나 더,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겸손은 대부분 티 나는 억지 겸손이다. 타인의 질투심을 자극해 쓸데없이 해코지당하는 일을 피하려는 비겁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가짜인 거 다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는 진실로 겸허해야 한다. 모두 내가 다 노력해서 된 거라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새벽에 불안해하며 깨지 않는다. 좀 더 자도 된다. /58
오래 걸으면
...
'외로움'은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꼽으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두 단어는 꼭 포함된다.
'어머니'와 '그리움'이다. 특히 그리움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
우리말에서 '그리움'은 세계 그 어떤 단어보다도 아름다운 말이다. '그리움'은 그림畵, 글書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긁는다는 것이 뽀족한 도구로 대상에 그 흔적을 새기는 행위라고 할 때, 활자의 형태로 긁는 것은 '글'로, 선이나 색을 화폭 위에 긁는 것은 '그림'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어다.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할 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은 '설렘'이다. 행복의 기준은 바로 이 설렘의 유무다. 그저 느긋하고 여유로운 상태는 행복이 아니다. 금방 지루해진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설렘이 동반된다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된다. 사랑에는 그리움과 설렘이 동반된다. /97
외롭다는 것은 무언가 그립다는 것...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글이 된다.
'그리움'은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그림畵' '글書'과 어원이 같다.
긁는다는 것은 흔적을 새긴다는 것.
종이 위에 쓰면 글이
화폭 위에 칠하면 그림이
마음속에 새기면 그리움이 된다.
남에 의해 바뀌면 참 힘들다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를 심리 치료에 응용한 게슈탈트 치료법에 따르면 삶이란 이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삶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지금까지의 전경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배경이었던 부분이 전경으로 올라온다. 이러한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의 과정이 내 삶의 '내러티브narrative'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않을 때다.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이 계속 버티고, 전경으로 올라와야 할 배경이 애매할 때다. 내 삶의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다는 거다.
삶의 게슈탈트를 바꾸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다.
첫째, '사람'을 바꾸는 거다. 항상 같은 사람들을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삶의 게슈탈트가 건강해진다.
둘째, '장소'를 바꿔야 한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과 태도도 바뀐다.
마지막으로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전혀 몰랐던 세상에 대해 흥미가 생기면 공부하게 된다.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관심을 바꾸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관심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삶의 장소도 바뀌기 때문이다. /103, 106
나무늘보처럼 아주 천천히 커피를 끓이던 학교 앞 카페 주인 할아버지는 내가 문을 나설 때마다 낮고 느리게 물었다.
잊어버린 물건이 없느냐는 거다.
물론 잊어버린 것은 없었다.
어느 가을날, 청춘 커플을 돌아보며 깨달았다.
난 분명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난 '그 매기'가 '그 메기'인 줄 알았다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그 매기'가 '그 메기' 인 줄 알았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지금 그 노래를 말하는 거다. 어릴 때 난 이 노래가 참 좋았다. 내게 금잔디 동산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대전 공군기술교육단 뒷동네에 있던 공동묘지였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난 이름 없는 무덤 위에 누워 얼마나 '그 메기'를 흥얼거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해가 지도록 하늘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매번 "아주 가지가지한다!"며 심란해하셨다.
사실 물고기인 메기랑 금잔디 동산에서 함께 논다는 노래 가사가 많이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산에도 메기가 뛰노는 개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메기가 여자 이름인 '매기Maggie'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 메기가 '매기'라면 이 노래는 더 희한한 노래가 된다. 밤낮으로 '동산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물레방아 소리 들리도록' 문제의 그 여자, 매기하고 놀았다는 이야기다. 애들이 부를 노래는 아니었던 거다.
좌우간 동양이나 서양이나 물레방앗간은 참 흐뭇한(?) 곳이었다. 슈베르트도 '물레방앗간의 아가씨'를 주제로 연가곡을 만들었다. 그 아가씨가 괜히 물레방앗간에 있었던 게 아니다. 아무튼, '그 매기'의 실체를 알게 된 후로 난 더 이상 그 음탕한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는 안 부른다. /303
산책은 우울함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걷다 보면 주의가 분산되면서 우울함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생각이 떠 오른다. 걷기에 동반되는 몸의 리듬은 유쾌한 감정을 일으킨다. 즐거우면 몸을 흔들게 되지만, 몸을 흔들면 즐거워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304
그림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인생의 주인이 돼라!'고 무수한 자기계발서들은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주체적 방법론은 제시하지 않는다. 주체적 삶이란 그렇게 주먹 불끈 쥐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아실현은 공부를 통해 구체화된다.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노후대책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훨씬 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이나 다른 서구 국가들이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내린 고령화 사회 대책은 공부다!
평생학습 개념도 고령화 사회라는 맥락에서 나오는 거다. /318
좌우간 난 늙으면 그렇게 영어 책, 독어 책, 일어 책, 한국어 책을 싸들고 비행기를 탈 거다. 땅콩 따위는 먹지도 않고 그렇게 우아하게 책만 읽을 거다!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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