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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長水)의 삼절(三節) 본문
<長水 三節>
장수의 삼절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해 있을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물에 투신한 의암
(義巖) 주논개(朱論介,1574~1593)의 충렬과 목숨을 바쳐 향교를 지킨 충복(忠僕) 정경손(丁敬孫,생몰
미상)의 호성(護聖) 의기(意氣),그리고 맡은바 책무를 통감하고 현감따라 순결한 배리(陪吏) 백씨(白
氏)의 절의를 '견의불위무용(見義不爲無勇)' 즉 의로움을 알고도 용기가 없어서 결행하지 못한다면
의인이라 말 할 수 없다는 의지를 절의의 표상으로 삼았다.
3절 즉 주논개,정경손,순의리 백씨 등 세 사람의 절의를 기린 의암사, 정충복비, 타루비등이 장수군
역사터에 모셔져 그들의 의를 기리고 있다.장수인들은 이들 세 사람의 충절과 절의를 추앙하여 이들을
장수삼절이라 한다.
그 첫번째 주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사'로 향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논개는 왜병장수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로만 알고 있었다.
그 논개가 장수사람이고 특히 성씨가 주씨임을 이번 답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장수문화원사무국장 고태봉님께서 주논개에 대해서 자세히 재미나게 해설을 해주셨다.
이후의 장수삼절에 대해서 해설을 책임져 주셨다.
붉은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의암사.....
장수 향교(長水 鄕校)는 태종 7년(1407)에 차언한 것으로 처음 건립된 곳은 장수면 장수읍 선창리
당곡이었다. 세종 2년(1456)에 조정의 결정에 따라 문묘(文廟)를 대성전으로 편액 했다.
선창리 당곡에 창건한 향교터가 침하하고 건물에 비가 새어서 숙종 11년(1685) 3월에 장수읍 장수리
현 위치로 이건 사업에 착수하여 이듬해 1686년 2월에 이건 완료했다.
정유재란때 충복 정경손이 목숨을 걸고 왜군의 병화(兵火)로 부터 보존케 한 향교는 선친리 당곡에
처음 창건했던 향교이다. 난중에 인명이 파리목숨 보다도 못할 때 필사적으로 향교를 수호했기에
600여년전의 조선식 건물양식의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삼강록에 기록에 의하면 - 경손의 성은 정씨이며 향교 노복이다.임진란을 당하여 왜적이 향교의 성전을
침입하였을 때 경손이 묘당의 계단에 엎드려 처음부터 끝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왜적이 의로운 사람이라 칭찬하고 따라서 신표를 주어 이로 말미암아 성전이 편안하였다.
비를 세워 제사 지내게 했다.)
임진 정유왜란의 병화로 전국의 향교가 소실되어 중수할 때 장수향교 대성전의 본(本)을 따서 복원할
수 있었다.
부산민학회 주경업회장님께서 건축물의 양식과 역사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계신다.
열심히 귀 기울이는 민학회회원들.....
<타루비>
장척마을 옆 산 기슭에 서 있는 이 비석은 장수현감과 생사를 같이한 어느 관리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 2년(1802)에 세운 것이다.
어느날 현감이 말을 타고 이 부근을 지날때, 마침 주변에 있던 꿩이 말 소리에 놀라 하늘을 날았고 이에
말도 놀라 현감과 함께 절벽 옆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수령을 수행하던 관리는 자신이 말을
잘 다루지못해 현감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바위에 통탄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의
'타루'라는 글자를 새기고 꿩과 말을 그린 다음 물속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도로가 나면서... 여기저기 조성을 하면서.... 원형들을 거진 다 잃어 버린 모습이라 아쉬운점이 많았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제대로 보존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곳은 그런 의미가 있는곳이구나라는 느낌만 가져갈 뿐 원형은 하나도 없는듯 해서
정말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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