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선비의고장 영주 소수서원 본문
영주는 예전엔 부산에서 갈려면 좀은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그러다보니 참 맘먹고 나서기가 쉽지않은 고장이었건만 도로가 잘되어서 쉽게 접근이 가능해졌다.
영주시는 소.태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문화유산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역사문화 고장
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사원인 소수서원을 만나기위해 길을 나섰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에 의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회헌 안향선생이 공부하던 이곳에 사묘를 세우고 그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시 나라에 상소를 올려 명종 5년(1550)에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을 때 서적, 노비, 토지를 함께 하사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소수서원 학예연구원이신 박석홍님께서 소수서원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을 열성적으로 해주셔서 우리
모두 딴짓(?) 못하고 열심히 집중할 수 있었다. ㅎㅎ
소수서원 경내에는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학자수'라고 부른단다.
천년을 살고 있는 적송은 나무껍질이 육각형모양을 띤단다.
겉과속이 모두 붉다하여 적송이라한단다.
'白雲洞'과 '敬'자 바위....앞에 흐르는 물은 죽계수...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은 퇴계 이황선생의 글씨로 전해오고,붉은색의 '경'자는 신재 주세붕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신재집에 전해오며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이다
경자가 붉은 이유는.....세조 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유생들은 정축지변이라
는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때 참화를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곳 '죽계천'을 떠돌면서 곡소리
를 하더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
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경렴정(景濂亭)은 1543년 신재 주세붕선생이 지은 우리나라에서가장 오래된 정자중의 하나란다.
현판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렴계 주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주돈이의 호인 "렴계"의 첫글자인
"렴(濂)"자를 땃고 회헌선생을 높이는 뜻에서 경(景)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니까 품격이 높은 정자란다.
경렴정 초서현판 "정"자의 감고 치켜 올린 꼬리 부분이 원래 용트림 하는 모습이었으나 일제때 제국
주의자들이 우리민족의 기를 꺽는다며 글씨 꼬리를 잘랐다고 한다.
퇴계의 명을 받고 '고산 황기로'가 쓴 경렴정 현판.....(원판은 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복사품임~~^^*)
(고산 황기로는.....조선중기 퇴계문인이며 자암 김구(金絿),봉래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3대 초성(草聖)으로 일컫음.
성생단(省牲檀)
성생단은 문성공 회헌 안향선생의 사당에 매년 봄,가을(움력 3월,9월) 초정일날 제사를 지낼때 쓰이던
희생의 흠결여부를 간품한 후 제물을 잡던 제단터.....
참고로 임금이나 하늘에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 쓰였고 그외에는 보통 돼지가 제물로 쓰였
다고 한다. 그러니 '히브리' 풍습과 비슷하다.
<강학당 보물 제 1403호>
강학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 놓고
배흘림 기둥양식이 특이한 구조이다. 최초의 사립대학인 것이다.
<문성공묘 보물 제 1402호>
회헌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신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 주세붕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
서원원장과 교수가 기거하던 스승의 집무실이다.
<일영대日影臺>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일종의 <해시계>로 그림자를 나타내고자 막대를 끼웠던 홈통이중앙에 남아 있고 넓고 둥근 아랫부분은 간지로 시간을 나타내던 빗금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학구재>와 <지락재>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의 일부건물이다.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칸으로 꾸몄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한자인 아(亞)자형
으로 지어져 있다.
스승이 기거하는 곳은 반듯하게 깍은 돌로 되었고 아래 학생들이 기거하던 곳은 평범한 돌들로 되어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건물에도 담겨있다.
취한대(翠寒臺)
퇴계<이황>선생이 대(臺)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다.'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에서 비취 '취'자와 차가울 '한'자를 따온 것이다.
'금성단'
순흥의 '단종복위운동'은 세조3년(1457)에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임금(노산군)을 쫓아내고 왕의 자리에오르자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반대하여 이곳 순흥에서 복위시켜 주려고 계획하다 드러남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된 사건임.
*회헌선생(1243-1306)은 당시 불교의 폐해로 나라가 어지러울때 흔들리던 고려왕조의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고자 원나라에 가서 주자학을 수입하여 우리나라에 보급한 최초의 주자학자이다.
안향선생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훗날 새로운 왕조<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유교를 국가 통치원리로 삼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조선이 개국되면서 조선왕조가 선생의 학문(주자학)을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드리게 되면서 겨레의 참스승으로 민족의 대성으로 동방도학의 비조로 추앙 받게되었다.
2009년 6월7일/소수서원을 다시 찾았다. 예전엔 부산에서 부산민학회 회원들과 함께
였는데 2년이 지난 현재 나는 서울에서 우리땅회원들과 답사가 아닌 걷기위해 영주를
찾았고 2년이란 시간동안 서원주위의 많이 변한 모습이 새롭다.
선비촌이란 한옥촌이 생겼다. 저잣거리까지....
'바람길따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 (0) | 2008.01.18 |
---|---|
순천만에서 정해년을 보내며... (0) | 2007.12.28 |
함양 정병호가옥(鄭炳鎬家屋) (0) | 2007.05.19 |
장수(長水)의 삼절(三節) (0) | 2007.05.19 |
평사리의 최참판댁 (0) | 2007.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