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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8월의 낙동강 그 뜨거웠던 현장(2) 본문

물길따라 떠나는 여행/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걷다

8월의 낙동강 그 뜨거웠던 현장(2)

다보등 2009. 8. 26. 12:38

낙동강 천삼백리길을 걷다 여섯번째구간

2009년 21일~23일

 

 

많이 힘드시죠? 쉬다 가세요!!

샤워시설 완비!!

말만 들어도 감사해요~~~ㅋㅋ

 

암튼 주유소 바닥에 철부덕 널부러져 쉬었다 갑니다~~~ㅋ

 

 

 

달성 삼가헌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달성 삼가헌은 1769년 충정공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현재의 정침터에 지은 살림집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그의 아들인 박광석이 이를 헐고 1809년에 안채를, 18년후에는 새로 사랑채를 지었다.

1874년에는 박광석의 손자인 박규현이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부설하여 별당채를 짓고 '하엽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하엽정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 연당 역시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사랑채의 당호인 '삼가헌'의 유래는 건물 내부벽에 걸린 '삼가헌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삼가헌을 뒤로하고 육신사로 가는 산길......

기행하는 중간중간 주변의 문화재를 둘러보는 기회를 주시니 이 또한 정말 좋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기와를 이고 있는 마을이 불현듯 나타난다.

 

육신사 입구에 있는 "도곡재"

1778년(정조 2)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건립하였으나, 1850년대 인조때의 문신인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 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하였다.

 

육신사(六臣祠)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이신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의 집성촌이다.

구한말까지는 300여호의 집이 꽉 들어 차 있었으며 광복이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호만 남아 있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끝에 높직한 외삼문(外三門)이 나온다.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六臣祠)의 정문이다.

 

"육신사" 글씨는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이다.

 

 

태고정(太古亭) 보물 제554호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 선생이 99칸 집을 짓고 살 때 세운 정자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네모진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로 세웠다.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서쪽 방에는 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정자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뒤쪽 구석에 자그마한 부엌을 꾸며놓아 아기자기함을 더해 준다.

 

 

 

 

 

달성 하목정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하목정에는 고모(94세)와 조카(88세)되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 현감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하목정"이란 이름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이곳에 머문적이 있어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건물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유명인들이 남긴 시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뜨거웠던 한낮의 태양이 서쪽 하늘로 몸을 숨길즈음 우리들도 오늘 힘들었던 하루를 접고 숙소로 향한다.

오후7시30분....해가 확실히 짧아졌다.........

종일 아스팔트길을 걸은 탓인지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간단하게 수술(?)을 하고 나서 보니 고생한 내 발이 안쓰럽다.....ㅜ.ㅜ

숙소앞 마당에서  부추전에 호박전을 준비한 전주팀들에게 감사하며 초석님이 준비한 치킨에 맥주를 나눠 마시며

왼종일 수고한 우리들에게 서로서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내일을 위해 용기를 북돋는다.......아쟈!

 

둘쨋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힘들었던지 오늘 걸을 수 있을까싶은 꾀가 스물스물 밀려 온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시고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금오산 자락을 보니 힘이 솟는다.

아쟈!!! 다시 시작이다~~~~

 

금오산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이틀을 잤다.

지난 5구간때의 형편없었던 숙소의 시설과 밥을 생각하니 이번 경북청소년수련원은 모두들 맘에 들어 했다.

 

역시나 오전 7시30분쯤 오늘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선석산아래 세종대왕자태실로 올라가는길.........

세종대왕자태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아래 태봉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등이 태어났을때 그 태를 넣어 두던 곳을 말한다.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 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분청삼감연화문뚜껑,지석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엔 이곳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선석사가 있다.

 

 

빙둘러 쳐진 산자락을 보며 불현듯 가야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가 생각이 났다.

남연군묘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는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사진 : 우리땅 공윤님>

 

 

선석사(禪石寺)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 217

선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서 신라 효소왕1년(692)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처음에는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건립되었으며

"신광사"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나옹대사 혜근이 신광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으며

이때 절을 옮기려 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하여 지금처럼 선석사라 고쳤다고 한다. 선석사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숙종 10년(1684)에 은현, 혜묵, 나헌스님이 중창하였고 영조 1년(1725)에 옛터로 옮겼다가 순조 4년(1804)에 동파 서윤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에 소장된 영산회괘불탱은 보물로,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선석사에는 다리가 세개밖에 없는 개 '보리'가  있는데 밤이면 세조대왕자태실을 지킨다고.....

누구든 접근을 할라치면 사납게 짖어대어서 얼씬도 못하게 한다고 한다.

선석사를 갔다 온지 이틀후 화요일... MBC에서 방영을 했다고하는데 나는 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