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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11월의 낙동강 8차기행-첫째날(1) 본문

물길따라 떠나는 여행/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걷다

11월의 낙동강 8차기행-첫째날(1)

다보등 2009. 11. 30. 18:18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걷다 여덟번째 기행

2009년 11월 27일 ~29일

코 스 : 남지읍 - 임해진나루 - 수산나루 -삼랑진

 

 

남지읍(南旨邑)은 창령군 2읍, 12면의 하나로서 본래 창령군의 지역으로서 가장 남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남곡면이라 하였고 1912년에 남지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지교 아래에 함안읍 칠서면 이룡리로 건너가는 웃개나루 터를 지나 신남지교와 창남 낙동강교를 벗어나며 남지는 저만치 멀어지고 남송교를 지나자

도천면이다.도천면(都泉面)은 예전에 도천향(都泉鄕이 있었으므로 도천면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나고 있는 송진리(松津里)는 본래 영산군 도천면의

지역으로서 쇠나리가 있으므로, 쇠나리, 소나리, 또는 송진이라 하였다.송진나루는 조선시대에 주로 세곡을 집결시켜 낙동강 하류에 잇는 삼랑창으로

실어 날랐고 일제시대에는 양곡을 부산항으로 실어 나르던 큰 나루였다. 이곳 송진리에서 낙동강은 계성천을 받아들인다.

일명 큰내라고 부르는 계성천은 창녕읍 옥천리 북쪽 관룡산 밑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른다.<낙동강역사문화탐사 中>

 

 

11월 28일(토)

남지읍에서 시작되는 8차기행날 아침...

약간 흐린날씨....아침 안개가 자욱하여 수묵화 같은  풍경이 아름답다.

 

 

안개속에 잠긴 남지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낙동강을 따라 창녕쪽으로 gogo~~

 

넓은 강변 고수부지엔 끝도 없이 유채밭이 이어지고......

봄날.....유채꽃이 필때는 정말 장관일듯 싶다....

 

 

그런가 하면 강변 무우밭에 가득가득 쌓아 놓은 시래기 묶음들.....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로 건너던 나룻터는 사라지고 여정은 우강리로 향한다.

호우리와 요강리를 병합한 후 우강리라고 이름 지은 우강리에는 요강원이 있었고 요강교 동쪽에 망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은 정자에는 곽재우 장군의 유지비가 서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신정일선생님의 말씀도 들으며 간식타임~~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임진왜란 때 이름난 의병장 곽재우가 전공(戰功)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새운 비석이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래 함안, 영산, 창녕 등지에서 홍의장군으로 불리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장군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이 뜻을 모아 1789년(정조13)에 세운 것이다.

 

 

 

 

 

 

 

 

오전 10시 30분

유기사님이 우리를 위해 생강차를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쌀쌀한 아침에 뜨거운 생강차는 온몸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곳이 낙동강 18공구 다기능보 공사현장이다.

 

 

 

 

 

 

 

 

 

 

 

임해진 나루가 보인다.

임해진은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창원시 북면 외산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임해진 나루였다.

 

 

 

 

 

임해진나루에서 버스로 이동을 하여 우리들 숙소가 있는 부곡온천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후  임해진나루에서 다시 시작된 오후 기행길.......

 

구불구불 산길을 구비 돌아 가는 이 길은 임해진에 살던 개(犬)와 노리부락에 살던 개(犬)가 매일 다니며 만들어 놓은 길이라고 한다.....ㅎㅎ

 

임해진 나루에서 고개를 넘어서자 깍아지른 듯한 절벽너머 낙동강에 펼쳐진 모래톱이 반달모양이다.

 

 

개 비▼

옛날 임해진과 노리부락에 성(姓)이 다른 두 마리의 개들이 살고 있었다. 두마리의 개들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정(情)을 잊지못해 임해진에서

노리부락으로 매일 같이 험한 산길을 오고가며 정을 달랬다. 그러기를 여러번 왕래하고 보니 그 험하고 험한 산에 길이 생기고 말았다.

이 길이 있기전에는 노리와 임해진을 오고가는 길이 없어 한없이 고생을 했는데 이들 개에 의해 산길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개들이 뜻 없이 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개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비를 세웠는데 이를 개비라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 비석을 탁본하였으나

노후하여 글자를 식별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며 이후 이곳을 개비(犬碑) 또는 개로비(開路碑)라고도 불리어 지고 있다.

 

 

 기행은 계속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