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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레플리카展, 성남큐브미술관 본문

공연,영화,서적

프리다 칼로 레플리카展, 성남큐브미술관

다보등 2025. 2. 11. 09:12

설명절 연휴에 만난 동생이 성남큐브미술관에서 <프리다 칼로 레플리카 전>을 한다고 같이 가자하였다. 내가 미술전시회에 관심이 많다는 걸 동생이 아니까 추천한 거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비록 *레플리카전이긴 하지만 프리다 칼로를 책에서는 보았지만 직접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 경기옛길을 걸으며 판교박물관에서 영남길 스탬프를 찍지 못하고 지나친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지난 화요일(2월 4일) 판교박물관에 들러 영남길 1길 스탬프를 찍고 이매동 동생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성남큐브미술관으로 갔다.

 

*레플리카란? 원작을 모방하여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미술이나 공예 등 많은 분야에서 행해진다. 일명 모사로서 그림의 질감이나 재료의 특성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

 

 

프리다 칼로 레플리카 展

2024. 12.13. - 2025. 03.16.

성남큐브미술관 기획전시실

입장료 : 성인 6,000원(경로우대 : 5,000원)

주차 : 입장권 제시일 경우 2시간-1,000원

 

 

멕시코 태생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인생은 온통 고통이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약간 짧아지는 장애를 겪었고, 19세가 되던 해인 1925년 집으로 가는 중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사고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 끔찍한 사고는 프리다의 척추와 골반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체적 한계를 겪게 되었고 그녀는 평생 동안 약 30회 이상의 수술과 오랜 재활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비록 개인적인 면으로 볼 때 참담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그녀만의 강력한 삶의 방식으로 예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불굴의 화가이다.

 

푸른 집의 정원에서 강아지들과 한때를 보내는 프리다 칼로
푸른집 - 침대에 누워서도 창문을 통해 식물을 볼 수 있고 분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곳은 프리다의 '낮의 침실'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프리다 칼로의 푸른집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작업실과 푸른집 출입문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 작품으로는 프리다 칼로 대표작 중 50점이 네 개의 섹션에 전시되어 있다.

 

 

오후 2시에 도슨트의 설명이 있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들 진지하게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다.

(도슨트 해설 : 화~ 토, 오후 2시, 4시)

사고, 1926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 후 1년 가까이 척추를 고정하는 코르셋을 입고 지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침대에 부착하는 특수 이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거울을 달아 놓고 자신의 모습을 심도 있게 관찰하였다. 그리하여 자화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으며, 1923년부터 습작으로 시작했던 첫 번째 작품이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다. 

 

버스, 1929

그림의 제목이 '버스'이기 때문에 버스 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림의 전체적인 배경은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이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승객이 모습을 통해 멕시코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유형의 인물을 보여 준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31

1928년, 프리다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선구자이자 정치적 인물인 디에고 리베라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비둘기와 코끼리의 결합'이라는 별명과 함께 1929년 결혼했으며, 디에고는 프리다의 예술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와 미국 간 경계선 위의 자화상, 1932
헨리 포드 병원, 1932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다친 그녀의 몸이 가로막았다. 몇 차례 유산 경험은 절망감을 더해주었다.

그림은 그녀가 겪은 유산의 참혹함을 잘 보여준다. 침대에서 피를 흘리는 그녀의 주변으로 여러 상징이 펼쳐져 있다. 유산으로 죽은 태아, 자궁과 골반 뼈가 있다. 기계장치는 망가진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래쪽으로 여성 성기 모양의 분홍색 꽃잎 사이로 거대한 수술이 튀어나온 꽃은 그녀가 겪은 성적 고통을 암시한다. 껍데기 사이로 속살을 드러낸 달팽이는 상처를 핥으며 살아가는 그녀를 상징한다. 성과 출산으로 인한 억압과 갈등으로 점철된 무의식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열린 대규모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서 출품하여 호평을 받으며 프리다는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프리다는 기독교적 도상을 차용하여 자신을 순교를 앞둔 예수로 표현하였다. 디에고와 이혼한 시기에 그린 이 작품은 전체적 구성과 인물 배치를 '최후의 만찬'이라는 기독교 주제에서 차용했다. 식탁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프리다 옆에는 디에고가 벽화 작업 시 자주 입었던 작업복을 입고 있는 후다스 인형은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때 디에고를 상징하는 이 후다스 인형의 한쪽손은 예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리다의 어깨 위에 걸친 채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이 작품은 1955년 전시를 위해 구소련으로 보내졌지만, 이후 실종되었다. 이후 2020년 6월 15일 멕시코 언론 엘 에랄도 데메히꼬에 따르면 멕시코 여성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한 그림이 사라진 지 65년 만에 다시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상처 입은 식탁, 1940

 

 

프리다가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남편 디에고의 집에서 나와 멕시코 시티의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별거 중에 그린 작품으로 프리다의 디에고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다. 당시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인 남성이 재판 과정에서 범인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 뻔뻔스럽게 증언한 "고작 몇 번 찔렀을 뿐"이라고 말한 것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속의 죽은 여자는 프리다 자신이고 자신을 죽인 살인자는 디에고일 것이다. 

몇 개의 작은 상처, 1935

 

 

앙드레 브르통

"멕시코에 도착하여 내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 느낀 경이로움과 기쁨은 무한정적이었다.

칼로의 그림은 순수한 초현실적 요소로 충만해 있었다."

 

물이 내게 준 것, 1938

초현실주의 적인 요소의 그림으로 입욕자의 시점에서 그려진 작품이다. 두 발이 물에 비친 모습을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그려 놓았고 그중에서 오른쪽 발에 난 상처는 썩어가는 듯하며, 오른쪽 나무 위에 죽은 채 누워있는 새는 다리 한쪽만 있어서 자신의 발을 신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 공양으로 여긴 듯하다. 욕조 물속에 그려진 내용들은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게 한다 그녀의 반 평생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 이 무렵 프리다가 마무리 중인 이 작품을 브르통이 보고 프리다를 초현실주의자로 규정하고, 초현실주의전 등의 참가를 주선했다.

 

기억(심장), 1937

 

프리다 칼로

"나는 브르통이 멕시코에 올 때까지도 내가 초현실주의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고, 나 자신의 리얼리티를 그렸을 뿐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며, 나는 다른 어떠한 생각과 심사숙고함 없이 단지 나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린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 1937

프리다는 양손에 꽃다발과 편지를 쥔 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편지에는 "애정을 듬뿍 담아서 레온 트로츠키에게 드립니다. 1937년 11월 7일, 멕시코 산 앙헬에서 프리다 칼로"라고 쓰여있다. 

프리다는 트로츠키를 사랑했고, 그를 통해 1924년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시인 브르통을 만날 수 있었다. 트로츠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브르통은 1938년 트로츠키를 만나러 멕시코를 방문해 파란 집의 서재에 걸린 이 그림을 보고 반했다.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 1936

 

서로 오른손과 왼손을 맞잡은 두 명의 프리다가 두 개의 심장을 잇는 동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심장이 몸밖으로 나와 있다. 오른쪽의 프리다는 리베라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린 원형의 작은 초상화를 들고 있다. 이는 자신에게 크나큰 고통을 준 사람이 디에고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왼쪽의 흰옷을 입은 프리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핏줄을 잘라 피를 흘리고 있다. 두 명의 프리다는 서로 심장이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 죽을 두 있음을 암시한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이 그림은 디에고와 헤어져 있는 나의 우울한 기분을 기록한 것이다.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 의상을 입은 여자는 디에고가 사랑했던 프리다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웨딩드레스 같은 흰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디에고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프리다이다."

 

내 마음속의 디에고(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1943

디에고가 먼 곳을 응시하는 얼굴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시선은 프리다의 시선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프리다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에 쓴 식물의 잔가지들을 그물 같은 덮개에 거미줄처럼 잔뜩 쳐서 디에고를 먹잇감처럼 붙잡아 두려는 듯하다. 프리다는 테우아나 전통의상을 즐겨 입으며 자신의 멕시코 혈통에 대한 자긍심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서처럼 테우아나 여인들은 명절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쓰곤 했는데, 

프리다 역시 테우아나 차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

그림을 보면 여성미보다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프리다가 디에고와 이혼한 직후 그린 작품으로 그녀 자신의 메마르고 외로운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 헐렁한 남성 정장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 주변에는 머리카락이 널려 있다. 아마도 프리다는 디에고의 추억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자신의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이러한 프리다의 마음은 작품 윗부분에 씌여진 글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알겠니, 내가 널 사랑한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결국 이 그림에 표현된 내용들을 볼 때 프리다가 가위를 들고 있다는 것은 과거를 단절하겠다는 의지이며, 헐렁한 남성복은 디에고가 입던 옷으로 프리다는 이제 디에고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는 다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세노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1949

프리다 자신은 밤과 낮으로 나누어진 세계에 대지의 여신이 되어 디에고의 몸에 들어가 그를 소유하고 그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 그리고 프리다와 디에고의 발 아래에 솔로틀이 개의 형상으로 있다. 죽은 자를 등에 실어 9개의 강을 건너서 지하 세계를 옮겨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는 신화의 솔로틀을 통해 죽음과 삶의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었다.

디에고는 아기처럼 아내 프리다의 품에 안겨 있다. 디에고의 이마에는 커다란 외눈이 박혀 있고, 손에는 인류 최초의 문명을 가져다 준 불꽃이 들려 있다. 이 작품은 프리다가 쓴 일기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1940년대 중반부터 프리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렸고, 이를 해결하고자 여러 의사들을 만났다. 의사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치료 방법을 추천했고, 그는 코르셋을 비롯한 다양한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허리를 곧게 펴고 쇠약해진 몸을 지탱했다. 

1944년 엘 페드레갈의 화산지대에 서있는 자신을 묘사한 <부러진 기둥>을 제작했다.

그림 속 프리다의 시선은 담담하지만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있다. 척추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금이 간 이오니아식 기둥이 위태롭게 세워져 있다. 여러 개의 못이 얼굴과 몸을 관통하고 있다. 

부러진 척추, 1944
상처입은 사슴, 1946

1946년 프리다는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이 수술을 통해 심한 허리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실패했다. 이 그림은 그녀를 표현했다. 수술에 대한 실망, 멕시코로 돌아간 후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우울증에 시달렸다. 프리다는 화살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어린 사슴의 이미지를 통하여 척추수술 후의 절망감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희망을 품기도 하였다.

 

디에고와 나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정물을 많이 그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정물화는 탐스럽게 익었으면서도 때론 으깨어져 묘사되었다. 과일의 생명력과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즐겼으며, 과일을 그리면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다 칼로는 과일이 내포하는 인생의 무상함을 역시 알고 있었다. 정물화는 일반적으로 중립적인 소재이므로 풍경화, 초상화의 소재보다 자유롭게 형식을 조작할 수 있는데 프리다 칼로의 정물화는 묵시적 함의를 지닌다.

 

생명의 과일
수박이 있는 정물, 1953

 

프리다는 강렬한 색감을 사용하여 과일들을 묘사했다. 그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한 색상은 감정의 강렬함과 상징성을 강조하며, 과일들의 형태와 색은 자연의 생명력과 동시에 그 안에 내포된 상처와 고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앵무새가 있는 정물, 1951
앵무새와 깃발이 있는 정물, 1951
살아있는 자연, 1952

 

 

한가운데 둥근 수박이 통째로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저마다 달리 잘린 수박 여섯 덩어리가 모여 있다. 가운데 수박 껍질은 짙푸르나, 그 오른쪽 수박은 노란 기운이 많아 흐릿하다. 반으로 자른 수박은 흰 섬유질을 따라 점점이 박힌 씨앗이 영롱하고 속살이 새빨간 걸 보니 푹 익어 무르게 생겼는데, 꽃처럼 자른 수박은 씨가 없이 부드러워 영글기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수박조차도 모아놓으면 이렇게 생김새와 숙성 단계가 다른데 인생은 어떻겠는가.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즉 '삶이여 만세'라는 제목의 이 정물화는 프리다가 47세로 요절하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모든 불운과 아픔을 향해 보란 듯 날리는 당당한 메시지, "삶이여 만세"

삶이여 만세(Viva La Vida), 프리다 칼로, 코요아칸 1954 멕시코

 

1954년 7월 2일, 폐렴을 앓고 있던 프리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콰테말라 내정간섭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 이때 디에고가 프리다의 휠체어를 밀었다. 시위로부터 닷새가 지나고 프리다는 44세 생일(실제로는 47세였지만)을 맞이하여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1954년 7월 13일 이른 아침 프리다는 푸른 집에 있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무릎 아래 절단 수술을 하기 직전에 기록한 프리다의 일기장, 스스로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으로 묘사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이 의심할 나위 없는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녀가 이 나라 미술계 내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인정 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작품은 고대 멕시코의 신화와 전통에서 빌려온 이미지와 형식을 이용해 개인사적인 문제에  접목하여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명성에 힘입어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여 국외 반출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그리고 멕시코 화폐 중 제일 고액권인 500페소 지폐의 한쪽면에는 프리다 칼로가, 한쪽면에는 디에고 리베라가 있다. 근대 미술가 부부가 지폐의 앞뒷면에 등장하는 것은 멕시코가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두 미술가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멕시코 화폐 중 제일 고액권인 500페소, 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

 

 

 특별체험 ZONE / 자화상 그리기, 프리다 칼로 머리장식 만들기

패션잡지 '보그'의 표지에 실리고, 그녀의 기사가 보도되면서 대중에게 프리다가 알려졌다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지은이 르 클레지오

지은이 르 클레지오 " 새로운 출발, 시적인 모험, 관능적인 황홀경으로 우리를 이끄는 작가, 문명을 넘나들며 휴머니티를 탐구하는 작가, 르 클레지오에게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합니다." 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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