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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속의 폐사지 보령 '성주사지' 본문

바람길따라서

눈보라속의 폐사지 보령 '성주사지'

다보등 2011. 1. 10. 09:40

눈보라속의 폐사지 보령 '성주사지'

 

 

 

                                                                                                                                                                                            
             “오서산 앞쪽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가서 성주산이 되었고, 그 산자락 아래 지금은 폐사지가 된 성주사지(聖住寺址)가 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 아래에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바로 성주사라는 사실이 1960년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

으며,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했다고 전해진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無染國師)가 김양(金陽)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 성주사의 규모가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는 1천여 칸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산파의 총 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 절에서 한때 2,500명쯤의 승려들이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하여 폐사지만이 사적

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때는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리나 흘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절터는 간 데

없고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보령의 성주사지에 도착하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바람과 함께 눈보라로 변했다.

갑자기 불dj오는 눈보라에 잠시 당황도 되었지만 이것 역시 행운이라 생각했다. 겨울의 쓸쓸한 폐사지에 눈이 내리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박은은 일찍이 보령을 일컬어 "땅의 형세는 탁탁치며 곧 날으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돗대와도 같다"고 하였으며 정대의 기문에는 "땅이 협소하고 서해가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 하였다. 이중환도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였는데 책리지를 쓰던 무렵 보령의 서쪽에 수군절도사의 군영이 있었으며 영 안에 영보정이 있었다.

이곳은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 있기 때문에 명승지라 불렀다고 한다.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성주사지 석계단/문화재 자료 제140호

금당인 대웅전에 오르는 돌로 된 계단이다. 원래 돌계단 양옆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이 사자상 측면석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사자상이 도난당해 현재는 계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속에 잠잠히 말이 없는 폐사지에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대웅전이 있었을 저 자리에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칸,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리나 흘렀다고 하는 성주사의 번창하였을

당시의 북적이던 절집의 분위기를.....하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눈보라속에 묵묵히 서있는 허망함이라니....

 

 

성주사 낭혜 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이절에는 최치원(崔致遠)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로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彗和尙白月寶光塔碑)가 있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하는데, 당시 당나라의 여만선사((如滿禪師)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며 낭혜화상을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전체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 솜씨를 발휘하여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龜跌)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비신(碑身)은 성주가 주산지로

이름이 높은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되어 있으며,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곤(崔仁滾)이 쓴 것으로,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머지 사산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부도비(眞鑑禪師浮屠碑),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大乘國師碑),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智證大師浮屠)이다.

 

 

 

 

 

 성주사지 석불입상/지방문화재자료 제373호

성주사 강당지 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입상은 코를 긁여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에 심하게 훼손되어 시멘트로 때움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