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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도적들과 인목대비와 임꺽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절집 "칠장사" 본문
일곱도적들과 인목대비와 임꺽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절집 "칠장사"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오르는 길옆엔 개망초가 만발하였고 개망초 건너에 부도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줄줄히 서있는 모습들이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로 피해있는듯 한켠으로 물러나 있다. 장마비가 내린 뒤끝이라 후텁지근하고 7월의 햇빛은 뜨겁다.
나무그늘로 피신한 부도탑들이 오히려 시원해 보인다.누군가에겐 잡초가 될지도 모를 개망초가 이곳에선 수수한 꽃으로 주변을 밝히고 있다.
칠현산을 병풍삼아 자리 잡고 있는 칠장사는 혜소국사비와 인목대비 친필족자 등 국보와 보물 문화재가 풍부하고 궁예,임꺽정,갓바치대사의
흔적과 전설이 깃들어 있는 천년고찰로 풍광이 아름답다.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절을 처음 지은 것은 636년 신라 자장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이 불분명하다. 본격적인 역사는 고려초 혜소국사가 머물면서 시작되었다한다.
입장료가 없는 편안한 절집 칠장사입구에 일주문이 있고 차량통행을 위한 진입로옆엔 은행나무들이 길 양켠에 서 있어 일주문 근처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 올라갔다. 그래봐야 5분남짓한 거리인지라 걷는데 부담을 느낄거리가 아니다.
천왕문 못미쳐 왼편으로 칠장산 둘레길 안내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어사 박문수가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에서 하루를 묵으며 모친이
준비해 준 조청과 유과를 올리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난후 꿈속에서 과거시험문제 8개중 7개나 나왔다고 한다. '몽중등과시'하여 장원급제 하였다
하니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칠장사 나한전에 기도를 드린다면 혹..모르지 않을까?? 다만 몇개라도 문제가 나오는 꿈을 꾸는 천운을 얻을지...._()_
사실 입시철이면 칠장사 나한전 나한에게 과자 공양 올리는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칠장사둘레길 표지판을 지나면 '칠현산 칠장사'라는 현판이 달린 서남향의 천왕문이 바로 앞이다. 칠장사를 품고 있는 칠현산은 일곱도둑들이
일곱현인이 되었다하여 칠현산이 되었다고 한다.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때 절주위에 있던 포악한 도적 일곱명이 살았다한다. 어느날 도적 중
한명이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러 절에 있는 샘에 갔다가 바가지를 보니 손금이라 얼른 물을 떠마시고 옷속에 숨겨 왔다고 한다. 다른 도적들도
물을 마시러 갔다가 순금바가지를 발견하고 감추고 돌아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 보면 몰래 가지고 온 금바가지가 온데간데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상하다고 여겨 각자 바가지를 숨겨 가지고
온 사실들을 실토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혜소국사가 조화를 부린 일임을 알게 되어 그들은 그날부터 스님의 교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모두 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뒷산 이름을 칠현산이라 부르고 절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했다고 전해진다.
흙으로 빚어 만든 칠장사 사천왕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의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남향의 칠장사 천왕문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 대웅전에서 ㄱ자로 구부러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1칸의 천왕문 안에는 4구의 사천왕상이 좌우에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17세기 전반으로 추측하고 있는 이유는 인조반정(1623년) 이후 복위된 인목대비가 죽은 부친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그 원찰로 삼아 여기서 기도 정진했다는 사실과의 연관성에 근거한다.
인목대비는 이 기간동안 이곳에서 <<금광명최승왕경(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1택을 사경하였다. 그리고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에 시
한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은 사천왕 신앙의 소의경전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당시 이 사찰을 원찰로 삼았던 인목대비와 사천왕 신앙과의 연계성을 통해
칠장사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이 시기로 추정해 보는 것이다.
인목왕후 칠언시는....
"늙은 소 힘쓴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 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다 말인가?" 이 시는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한 시이다
천왕문을 들어서 대웅전방향으로 가다보니 열반당 전각 벽면에 문득 사진 한장이 눈에띈다. 칠장사는 도적들과 인연이 깊은 도량이다.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일컬어지는 임꺽정의 활동무대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현장 답사를 토대로 씌여진 홍명희 소설
「임꺽정」의 무대이기도 한 칠장사에서 드라마 '임꺽정'을 촬영했었다고 한다....임꺽정의 소년시절 칠장사의 병해대사에게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고
임꺽정과 그의 여섯무리들은 칠장사를 정신적 의지처로 삼게 된다는...
칠장사 대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이며 왼쪽의 원통전과 더불어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1828년(순조 28)에 옮겨다 세운 것이라 한다.
대웅전 왼편에 있는 <원통전>으로 정면,측면 각 2칸으로 익공계 맞배지붕 전각이다.
원통전 오르는 소맷돌에 새겨져 있는 구름문양이 아름답다.
원통전앞 석탑... 초층 탑신도 누워 있으며 나머지 부재도 훼손, 마모가 심해 원형을 추측하기 어려우나 고려석탑으로 추정된다고...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규모에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1828년 옮겨다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숙종대를 거쳐 마지막으로 고종 14년에 중건하였으니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이라 할 수 있다.고색창연한 단청, 힘이 있어 보이는
맞배지붕이지만 민가에 많이 채택되는 같은 크기의 삼분합 띠살문 때문인지 무겁다는 느낌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고향 봉업사지를 떠나 기나긴 만행길을 접고 이곳에 터를 잡은 잘생긴 석불입상이 한분의 협시불과 나란히 서 계신다.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으로 보물 제983호이다. 이 석불입상은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1980년경 칠장사로 옮겨
온 것이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66.5cm이고 총 높이는 206cm이다. 옷주름은 여려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의 화불을 새기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초기에 유행
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보물 제 983호>
<장원리 석조보살좌상>
칠장사 거북바위는 누군가의 말처럼 뜨거운 햇살을 피해 땅속으로 머리를 파묻고 있는 모습이다. 재밌는건 하필 머리를 파묻고 있는 곳에만
풀이 무성하다. 맨땅보다야 그 편이 훨씬 시원할터.....ㅎㅎ
대웅전 문살을 찍고 있자하니 마침 보살님 한분이 대웅전 뒤편의 꽃창살문을 알려준다.뒤편으로 난 문이다보니 이런저런 못쓰는 물건들로 가려져
있어 자칫 지나칠뻔한 문이다. 보살님 말로는 오래된 문이고 간혹은 이 꽃창살문을 찍자고 오는 이도 있다며 부연 설명을 해 준다.
원통전을 지나 서북쪽 가파른 언덕위에 나한전과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가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한다.
1060년(문종 14)에 건립된 혜소국사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안성땅 칠장사까지 쳐들어 오자 한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국사의 비신은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보물 제 488호 <<혜소국사비>>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와 비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씨에서는 고려인다운 뛰어난 풍모가 느껴진다.
글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썻다. 비신의 양측에는 쌍룡이 새겨졌는데 그 솜씨가 극히 뛰어나다.
칠장사 나옹송/경기도 지정 보호수 안성 제25호
나한전 뒤편에 있는 이 소나무는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나옹은 죽산을 지나면서 태조의 진영이 모셔진 봉업사를 들르는 과정에서 이곳 칠장사에도 들러 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혜소국사가 일곱도적을 부처의 길로 이끈 이후에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일곱도적은 혜소국사가 가부좌로 열반에 들자 연기처럼 사라
졌다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16수행제자가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한'이라고 생각했다. 칠장사를 찾은 대각국사
의천은 "혜소국사는 부처와 다름없다"고 하였다한다. 하여 칠장사 나한전엔 혜소국사를 중심으로 나한이 된 일곱도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한전을 내려오며 약숫물을 퍼담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자주 물을 뜨러 오신다며 이곳의 물맛이 아주 좋다고 자랑한다.
아마도 이 샘물이 일곱도적들이 차례로 물을 마시러 와서 순금바가지를 훔쳐간 그 샘물이 아닐까?
차디찬 약숫물 한잔을 시원스레 마셨다. 뜨거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은 차디차다....
바가지는 흔히 약수터마다 있는 빨간,파랑 플라스틱바가지로 순금으로 보여지기엔 턱도 없다~~ㅎㅎ
명부전 벽면엔 혜소국사와 일곱도적이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궁예가 13살무렵까지 무예를 연마했던 곳도 칠장사라 전해지고 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백정이 중이 되어 생불처럼 존경받던 꺽정이의 스승 병해대사가 칠장사에서 입적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병해대사는 고리백정으로 갖바치로 그리고 백정 중으로 일생을 천대속에 보냈지만 성불하여 소도바(탑)에 한줌 재로 남을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었다. 병해대사와 임꺽정의 흔적이 만화같은 그림으로 남아 있는 칠장사이다.
<죽림리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칠장사엘 들어오며 놓쳤던 철당간지주를 찾아갔다.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와 갑사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드문 문화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장사의 풍수적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이 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지주에는 아무런 장식무늬가 없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너비가 약간씩 좁아지며 맨 윗면의 외곽을 둥글게 모를 깍았다.
또한 지주의 내측 상단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내고 철띠를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이들 당간과 당간지주를 받치는 대석은 자세히 조사
되지 않아 그 면모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단순한 방형대석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이 당간은 매우 소박한 지주를 갖고 있으며 당간은 현재 길이
60cm가량의 철통 15개만이 연접된 채 남아 있어 약 절반 가량은 결실된 것으로 보고있다. 현재 이 철당간은 조성내력과 관련된 방증자료가 전혀 나
타나지 않고 있어 그 조성연대를 추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다만 고려시대 이후의 철당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
칠장사에서는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결 눈에 들어 오는 이야기들이 많을듯 하다.
10여년간 경기도 문화관광 해설사로 계시는 윤민용씨는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해설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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