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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를 지나 목계나루로/한강종주
2013년 7월 14일(일)
공군 제 19전투 비행단앞을 지나며 한강종주 5차 7월의 둘째날이 시작되었다. 공군 제19전투 비행단은 아들이 군복무를 하던 곳이다. 딱 한번 면회 갔었고 더 이상은 갈 기회는 없었다.휴가를 어찌나 자주 나오던지 반가운 마음도 나중에 건성이 되었던 공군복무였다. 군복무기간이 육군보다 길었던것 같은데 편하다는 이유로 아들이 자원입대한 공군이었다.
오전에 비는 오지않았으나 흐린 하늘 덕분에 걷기에 적당한 아침나절이었다. 오후들어 비가 오긴 했지만 말이다. 출발이 좋은 아침이다.
자전거길 덕분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서울까지는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권태응 시비 '감자 꽃'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고 실려 있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이 휘하에 8,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서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서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슬슬 어두워 오던 하늘에 드디어는 비가 엄청 내려 한참을 이동을 못하고 비오는 탄금대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신립장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시간을 가졌다. 궂은 날씨만큼이나 꿀꿀한 역사이야기를 들으며 마침 적당한 시가 있어 한장 찍어 왔다.
중원 고구려비 /국보 제 205호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부락)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을 찾았다.
충주는 한반도의 중앙이라 옛 지명은 '중원'이었다고 한다. 충주지역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 신라의 접경지대로 삼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국토의 중심이라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어 차지하려 한 것일까?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은 우리나라 국보 제 6호로 통일신라시대때 세워진 탑이다.신라시대의 다른 탑들에 비해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목계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지맥인 부흥산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아우러져 태고 때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서울(京都)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 항구로 물화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고장의 하나라 오목계라 불렸고 경도와 해외의 신문화를 유입하던 곳으로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 때 가구 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1948년 하항의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마포 다음 가는 한강의 주요 항구였다.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이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충주 노은출신 신경림 시인이 노래했던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도 종적을 감췄다.
(사)우리땅걷기에서는 1300리 길 한강종주를 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을 하였고 12월까지 이어질 한강따라 걷는 여정에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강의 물줄기 태백시 검룡소에서 시작되어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후 서해로 들어가는 한강의 긴여정을 두발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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