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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임청각臨淸閣>, 보물제182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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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임청각臨淸閣>, 보물제182호

다보등 2022. 5. 9. 23:35

차안에서 보이는 전탑을 보고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알고보니 후배가 데리고 온 목적지가 이곳 임청각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99칸짜리 집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독립군 집안의 맥을 끊는다고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놓아 겨우 60칸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전탑(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임청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철길을 건설하면서 임청각의 부속건물들이 있던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 기차길을 만들었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땅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였다고 한다. 얼마나 임청각의 사람들이 눈에 가시였으면 이런 악랄한 짓거리를 했을까 싶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현수막을 보면서도 국무령 이상룡 선생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현수막이 쳐진 곳 안쪽이 중앙선 철길이 있던 자리란다. 서울 청량리역과 경북 경주역을 잇는 중앙선이다. 

일제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에서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오자 1942년 2월 나쁜 조선인이라는 뜻의 '불령선인' 이 사는 집이라며 일부러 노선을 우회시켜 집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놨다. 

 

 

'국무령'은 임시정부가 1926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채택한 지도체제로 임시정부는 모두 5번의 개헌을 통해 지도체제를 자주 바꾸었다. 처음에는 국무총리제(1919. 4~9)였다가 대통령제(1919. 9~1925. 4)를 거쳐, 국무령제(1925. 3~1927. 4)로 바뀌었다. 이후 국무위원제(1927. 3~1940. 4)가 시행되다가 주석제(1940. 10~1944. 10)로 되었으며 다시 주석, 부주석제(1944. 10~1945. 8)로 바뀌었다.

국무령제는 이상룡에서 양기탁, 안창호, 홍진을 거쳐 김구까지 5대가 유지되었으나, 중진급 인사들의 분열.대립이 여전하여 1927년에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바뀌었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그 이름을 지은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조선시대 민간 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으로 500년 역사를 간직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Mark Irving의 저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의 건축물 1001>에 소개된 임청각.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 그리고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 중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임청각은 1519년(중종 14)에 낙향한 이명이 지었으며, 1767년 봄에 허주 이종악(1726~1773, 임청각 11대 종손)이 고쳐 지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은 왕산 허위, 백하 김대락, 우당 이회영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선생을 포함한 11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안동에서는 맨 먼저 만세 운동을 전개한 동생 이상동, 이봉희, 일제가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을 부설했던 1942년 자결한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그리고 손자 이병화와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까지 모두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다. 

 

 

 

 

서간도 독립전쟁 지도자 석주 이상룡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기 위해 임청각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팔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일가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임청각의 주인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에 힘썼던 사람들이다. 한 가문이 그 명예를 500년이나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품위를 지키고 어려울 때 주위를 돌보고 베푸는 정신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가진 자의 리더십을 기꺼이 발휘해 왔기에 가능했다. 현재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라 하니 다행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깍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 다시 나의 처지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를 자를 수 있겠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며 만주로 건너가 한인동맹을 이끌어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사들을 키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1932년 만주 땅에서 순국하면서 그가 남긴 것은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이었다.

 

 

이상룡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아들 이준형은 십여 년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협박과 동시에 변절의 요구를 받자, 1942년 아버지 석주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정리를 마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자결했다.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君子亭은 조선중기인 1519년(중종14)에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양반 주택의 별당형 정자이다. 이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성장한 석주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군자정君子亭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 현판 <臨淸閣>

 

 

군자정에서 보이는 낙동강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 현재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 임청각처럼 유서깊은 종가의 종손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조상의 위패가 없는 사당

 

천지의 기운이 모인다는 우물방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물방은 진응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실제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방에서 출생했다.

 

정승이 태어난다는 우물방

 

 

 

대궐같이 아름다운 집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지만, 이상룡 선생의 국적은 2009년이 되어서야 회복되었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놓은 철로가 80년이 지난 2020년 12월 16일까지 기차 운행을 하였다.

임청각 앞으로 지나던 중앙선 철길은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에 맞춰 임청각 앞 철길이 사라졌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안동시는 일제에 의해 파손된 임청각을 복원하기로 했다. 

 

 

 

임청각에서 200미터 정도에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종택이 있다. 

임청각, 종택, 전탑 바로 코앞으로 기차가 운행을 하였다. 보면 철길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80년 동안 기차의 진동을 고스란히 받았을 전탑도 충격에 많이 훼손이 되어 남쪽으로 2도 가량 기울어져 피사의 사탑이라고도 한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장하고 늠름하게 서 있다.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철길 일부를 남겨 놓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데...

뭐 싹 철거를 해버렸다.

 

 

고성이씨 종택은 한옥 카페로 운영하고 있었다.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이 집은 고성 이씨 탑동파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고성 이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의 문신인 이황(李璜)이며, 안동에 처음 정착한 고성 이씨는 12세 이증(1419~1480)이다. 이증의 아들 이명이 임청각을 지은 뒤 고성 이씨 후손들이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이명의 증손자의 아들인 이적부터 탑동파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통일신라 시대의 절인 법흥사가 있었으며, 법흥사에 있던 전탑이 종택 앞에 남아 있어서 이 가문을 탑동파라고 불렀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전탑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한 법흥사에 있던 탑으로 추정되며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법흥사는 18세기 초반 문을 닫았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기록에 의하면 1914년 탑을 보수하면서 기단의 윗면에 시멘트를 발라 원래의 모습이 훼손되었다.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중과 사천왕 등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임청각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고 임청각 복원 사업이 마무리되면 칠층 전탑도 보수할 계획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