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여주 영릉(英陵) 세종대왕릉, 영릉(寧陵) 효종릉 본문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서 걷기 시작하여 두 시간이 채 못되어 봉화길이 지나는 구간인 여주 세종대왕릉 입구에 도착을 하였다. 오늘은 경기옛길 봉화길을 걷고 있는 중이고 영릉은 봉화길 구간에는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러 예까지 오는 건 잘 안되기도 하고 나는 몇 번 와본 곳이지만 남편은 처음이라 관람하기로 하였다.
영릉 입장료가 500원이다 (깜짝 놀라게 싸다.) 그런데 그조차도 만 65세 이상은 무료입장이다.
신분증을 보여주니 무료입장권을 내어준다.
여주 영릉은 조선 4대왕 세종 대왕(1397~1450)과, 제17대 효종(1619~1659)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같은 영릉이라고 하지만 한자가 다른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이다.
우선 먼저 만난 영릉英陵의 능침 주인은 조선 스물 일곱분의 왕 중에서 가장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이 계신 곳이다,
영릉은 조선 4대왕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능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태종 8)에 충녕군으로 봉해졌고, 1418년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고 두 달 뒤에 왕위에 올랐다. 32년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해시계, 혼천의,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 발명, 집현전 설치, 아악 정비,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활자 제조 및 농업 장려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위토답位土畓 : 위토位土는 제사나 관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한 토지를 말하며, 논은 위토답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왕릉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과 관리 이력을 기록한 <능지陵誌> 등에는 각 능. 원. 묘에 위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 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대 현 위치에 삼문과 행랑, 재방 안채만 복원되었다.
병꽃나무에 호랑나비가 있는 줄 몰랐는데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네모난 연못가에 있는 골담초는 꽃이 다 진 모습이다.
영릉은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이 미리 정했던 자리인 헌릉(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있는 현 인릉(순조와 순원황후의 능) 자리에 처음 조성되었고, 4년 뒤에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그 후 풍수지리상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469년(예종 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1970년대의 성역화 사업과 2014년부터 2020년까지의 유적종합정비사업에 의해 지금이 모습으로 복원.정비되었다.
정자각 지붕에 있는 토우(일명 잡상 또는 어처구니라고도 불린다.) -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같은 인물들이다.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신성한 공간인 능침의 원 지형을 보존하면서도 관람객의 문화향유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하여 '도래솔길'을 조성하여 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도래솔길 덕분에 영릉을 바로 옆에서 관람을 할 수 있다.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가 모셔져 있는 합장릉이다.
세종대왕릉에서 나와 왕의 숲길을 따라 동쪽에 있는 효종릉에도 가보기로 하였다.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英陵 )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숲길'이라 칭한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라 하였는데 그 옛날 여러 임금님이 이 길을 걸을 때도 이리 아름답고 울창한 숲이었으리라...
거리는 약 700m로 15분 남짓이다.
잠시 후 효종릉에 도착을 하였으나 오잉?
효종 영릉 향. 어로 및 주변 복원정비공사 중이었다.
공사 기간은 2024년 4월 5일~ 8월 31일.
홍살문 왼쪽 편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임시길이 되어있다.
보통은 금천교를 지나서 홍살문이 있기 마련인데 영릉의 금천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특이하다.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왕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능이다.
영릉은 효종이 세상을 떠난 현종 즉위년(1659)에 현 동구릉 내 원릉(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자리에 조성되었다가 능 안에 빗물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현종 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듬해에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과 같이 동원상하릉*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곡장이 둘러져 있는 위의 능침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의 능침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동원상하릉 : 왕과 왕비의 봉분을 같은 언덕의 위쪽과 아래쪽에 조성한 무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49년에 왕위에 올랐다. 10년간 재위하면서 대동법을 실시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청나라를 치려는 북벌계획을 세웠다.
인선왕후는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남 6녀를 낳았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효종의 대군시절 이름은 봉림대군, 그의 형이 소현세자다.
두 형제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아버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직후 인질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1645년 인질에서 풀려나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으면서 봉림대군이 형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고 그 3년 후 아버지 인조가 세상을 뜨자 왕위에 올랐다.
효종릉 역시 신성한 공간인 능침의 원 지형을 보존하면서 관람객의 문화향유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하여 '도래솔길'을 조성하였음을 안내하고 있다.
세종대왕릉은 바로 옆까지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었던 과는 달리 효종릉은 아래에서 관람할 수 있다.
조선 왕릉의 재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의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으며,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난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아 2007년 보몰로 지정되었다.
여주 효종 영릉재실은 1659년(현종 즉위년)에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처음 영릉을 조성할 때 지었던 것을 1673년(현종 14)에 왕릉을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 영릉의 재실은 안향청, 제기고, 재방, 행랑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열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효종릉 회양목과 같이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200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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