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우리땅 구석구석~~/충청도 (67)
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우리 차에 내비는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보령해저터널은 나오지도 않는다. 핸폰에 있는 내비를 이용하여 해저터널이 닿는 원산도해수욕장을 찍었다. 막상 목적지가 막연하던 터에 원산도해수욕장 지명을 언듯 티비에서 본 것 같아서리.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대천항, 대천해수욕장 방면으로 가다보면 해저터널입구가 나온다. 해저터널에 진입을 하였으나 그냥 평범한 터널을 지나는 것과 다른 것은 없다. 단지 해저터널을 진입하여 가다보면 어디쯤에선가 해저 80m라는 표식이 나오니 그때서야 여기가 바다밑인가보다 했다. 대천항에서 해저터널을 이용하여 원산도로 나오니 채 10분이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두구두구~~~드디어 보령해저터널로 진입을 한다. 그러나 막상 진입하고 보면 뭐 해저터널이라는 기분은 전혀 나지않는다. 흔한 터널을..
보령 충청수영성/사적 제501호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 관덕정, 대변루, 능허각. 고소대와 옹성 5개, 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진남문 . 만경문, 망화문, 한사문 등 4문은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의 아치형 석문만이 남아 있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지식백과 충청수영 진휼청/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 객사와 삼문만이 남아있다. 진휼청은 ..
찬바람 부는 지금이 제철이라는 굴구이를 먹으려고 보령까지 왔다. 예정에 없던 일이긴 하였다. 마침 전날 티비에서 천북굴단지 방송하는 걸 보고 즉석에서 결정한 일이었다. 사실 굴구이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12월 초에 보령해저터널이 개통을 하였다하니 궁금하던 차에 이참저참 시간이 되었다. 평일 보령 오는 길은 막힘이 없어 좋았다. 보령에 도착하여 우선 청소역엘 들러서 시간이 멈춘 듯한 70년대 분위기 물씬 나는 역사驛舍를 잠시 돌아보고 천북굴단지를 내비에 찍고 출발을 하였다. 평일이라도 주차된 차량들이 제법 많다. 주차를 하고 식당 쪽으로 가보니 석화가 담긴 커다란 굴망이 여기저기 식당마다 태산이다. 걱정인 게 식당마다 서로 오라고 호객행위를 할까봐 긴장되었으나 호객 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다고 입구에 적혀있..
등록문화재가 된 소박한 역사(驛舍) 청소역은 장항선에 유일하게 남겨진 간이역으로 1929년 역원 배치간이역으로 처음 영업을 개시했다. 역사驛舍는 1960년 대 초 지어진 것으로 단층 구조의 벽돌조 건축이다. 정면에 역전 광장이 자리하고 있는 녹색 기와지붕과 갈색 외벽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입구의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소박하고 단정한 느낌이다. 장항선에 남아있는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전쟁 이후 근대 간이역사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아 2006년 등록문화재 제305호로 등록되었다. 청소역(靑所驛)이 있는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는 시간이 멈춘 듯 단층짜리 나지막한 상점들과 집들이 도로를 따라 서있는 한적한 시골 동네였다. 청소역엔 역무원도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
동헌 오른편으로 담장을 끼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한번도 올라 가보지 않았던 곳인데 동헌에서 보니 언덕위의 단풍이 아름답길래 올라가 보기로. 해미읍성 동헌 오른편의 계단(많이 가파르고 쫌 높은)을 올라가니 멀찌감치 정자가 하나 보인다. 궁금한 마음으로 가보니 '청허정淸虛亭'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이다. 좀은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오르면 의외로 넓고 트인 공간이 나온다. 그 너머로 정자 하나가 있다. 이곳 '청허정淸虛亭'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성종 22년에 세운 것을 다시 복원한 정자다. 청허의 뜻은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은 가야산 내포문화 일대의 중심지이며, 조선 초기 200년간 충청도 방어기지 군사성 역할, 조선 후기 행정성 역할로 전환 인근의 중심이 되던 고을이었다.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전북의 고창읍성과 함께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해미읍성으로 조선 성종 1491년에 축성 완공되었으며 사적 제11호이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19세기 천주교 박해 당시 해미읍성 관아에서는 약 1000명의 천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