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1) 본문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갔다.
포로수용소를 갈려고 간건 아니지만 마침 거제도를 방문할 일이 생겨 찾은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엔 관람객들이 많았다.
아직은 추운 음력1월의 바람이 몸을 움추리게 만들고 손을 시리게 만든다.
탱크모형이 보이는 전시관입구가 높직이 올려다 보인다.
<대동강 철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의 길에 올랐다.
▶유엔군은 1951년부터 거제도 신현읍·연초면·남부면 360만평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많을 땐 인민군 15만명과 중공군 2만명이 북적거렸다.
수용소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으로 나뉜 포로들은 밤마다 충돌했다. 똥통에 빠뜨려 죽이고 천장에 매달기 일쑤였다.
1952년 5월엔 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납치됐다가 사흘 만에 풀려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상전쟁에 휩쓸린 여자들....
인민군출신과 전쟁지원을 위하여 동원된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이들 역시 같은 민족이였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과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현읍 수월리에 위치했던 제80 여자포로 수용소는 64 야전병원 수용소 인근에 자리잡아 남자 포로 수용소 밀집구역에서 벗어난 곳에 배치
되었으며 300여명이 수용되었다.
▶‘친공포로들은 드럼 뚜껑을 떼내 날을 갈고 나무자루를 끼워 창을 만드는가 하면 군화 속 쇠를 갈아 단도를 만들었다.’ 인민군 중위였던
반공포로 현동화의 회고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유엔군은 포로들을 희망에 따라 북으로 돌려보내거나 남에 남게 했다.
북의 가족이 다 죽어버려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현동화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 인도를 택했다. 그처럼 중립국으로 간 반공포로가
76명이었다. 최인훈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의 모델이다.
사람들은 거제시가 재현해 놓은 포로막사와 취사장, 야전병원에서 전쟁과 포로들의 가슴아린 참상을 본다. ‘광장’의 이명준은 왜 내 땅을 마다하고
중립국행 배를 탔으며 왜 바다로 몸을 던지고 말았나. 거제 포로수용소는 인간성을 말살했던 전쟁의 기억을 결코 지우지 말라고 한다.-자료참조-
▶북한은 고위 장교들을 거짓 투항시켜 거제 수용소에 들어가게 한 다음 친공포로들을 지휘하게 했다. 친공포로를 대표한 최고위 장교는
총좌(대령급) 이학구였지만 실제 지휘자는 본명이 ‘박사현’으로 알려진 인민군 고위장교였다. 그는 나중에 미군 심문에서 “대장 남일의 지시로
위장투항해 포로조직을 이끌었다”고 실토했다. -자료참조-
<포로귀환 및 송환>휴전과 함께 송환희망포로의 북송이 마무리 되었으며,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드디어 석방되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산군 포로 22,604명(중공군 14,704명 및 북한군 7,900명)그리고 국군,유엔군 포로 359명 등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휴전협정에 따라
120일간 비무장지대내에서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보호와 관리하에 양 국가의 관리자로부터 설득을 시작하려 했으나 공산측의 지연으로 30일이
지난 후 설득이 시작되어 1953년 12월 23일 그 시한이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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