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로즈의 일상 스케치
존 윌리엄스 '스토너 STONER' 본문
지은이 존 에드워드 윌리엄스(1922~ 1994) : 1922년 미국 텍사스 클락스빌에서 태어난 존 윌리엄스는 어릴 때부터 연기와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공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그는 첫 소설 초안을 써냈다. 전쟁이 끝나고 콜로라도로 이주해 덴버 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이 시기에 소설 <오직 밤뿐인 Nothing but the Night>을 출간한다. 이후 1954년 미주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55년 다시 덴버 대학교로 돌아와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교수의 길을 걷는다. 1960년, 그는 1870년대 캔자스 개척자의 삶을 다룬 두 번째 소설 <도살자의 건널목 Butcher's Crossing>을 내놓았으며, 이후 1965년 미주리 대학교 영문과 조교수의 삶을 그린 <스토너 Stoner>을 출간한다. 1972년 그는 네 번째 소설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내놓으며 내셔널 북어워드를 수상한다.
<스토너>가 세상과 만나기까지
1965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스토너>를 다룬 매체는 한 곳밖에 없었다. 단신으로 출간 소식이 전해진 뒤 초판 2천 부를 팔지 못하고 이듬해 절판되었다. 이후 50년이 흐른 뒤에야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줄거리>
스토너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농사를 더 잘 짓기 위해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농과대학에 입학하였다. 2학년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 수업에서 슬론 교수의 영향을 받아 농과대학에서 문학쪽으로 변경한다. 1914년 미주리대에서 문학사 학위 수여를 받던 날, 당연히 스토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농법을 적용할 기대에 부푼 부모에게 스토너는 대학에 남겠다고 말한다.
친구가 없고 늘 고독을 느끼던 스토너는 자신처럼 강의를 맡고 있는 박사과정 동료인 데이비드 메스터스와 고든 핀치 두 명과 친구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 났을 때 두 친구는 자진하여 군대에 입대하여 참전을 하였지만 스토너는 대학에 남아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아 클래어몬트의 저택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세인트루이스에서 온 날씬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을 가진 이디스에게 마음을 뺏겨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무지의 상태로 결혼했지만, 그 무지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성 경험이 없었고, 자신들의 미숙함을 의식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농가에서 자란 덕분에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들을 심상하게 받아들인 반면, 그녀는 그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을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있었다. 스토너는 한 달도 안 돼서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스토너의 세미나에 로맥스 교수의 제자 중 하나인 워커가 강의를 들으며 스토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로맥스 교수와 워커의 집요한 공격. 워커가 영문과 대학원 과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던 자신의 싸움이 실패로 끝났으며 이 일로 끝내 화해 요청도 거부한 로맥스 교수와는 그 뒤로 20년 동안 다시는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세미나 강의 청강생인 캐서린 드리스콜의 논문을 검토해 주면서 그녀의 아파트에 찾아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고 결국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대학 내에 소문이 나고 캐서린 드리스콜은 다른 도시로 떠난다. 그후 캐서린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해 여름에 그는 강의를 맡지 않았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병을 앓았고, 급속히 늙어갔다. 몸이 예전 같이 않음을 느끼면서 병원을 찾은 스토너는 암 진단을 받고 퇴직을 결정하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이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하게 생각해 볼 뿐이다.
미국에서 첫 출판 당시 독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절판 되었던 <스토너>가 50년이나 지나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건 어떤 이유일까? 유럽인들은 스토너의 어떤 부분에 공감을 했을까?
스토너의 삶은 누군가의 지적처럼 실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지 못했고,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으며 사랑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되뇐다. "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의 삶이 애잔하지만 그를 섣불리 실패자로 낙인찍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질문 때문이다. 그는 삶을 관조하는 자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가 자신의 실수 또는 남의 잘못으로 인해 겪는 고난은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이나 겪게 마련인 고난의 사례일 뿐이다.
책 속에서...
● 스토너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 군청 사람 말로는 농사를 짓는 새로운 방법들이 있다더구나. 대학에서 그런 걸 가르친대.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르지(......)
"무슨 생각이냐면......."
"돌아오는 가을에 대학에 들어가거라. 여긴 네 어머니랑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슬론 교수의 시선이 윌리엄 스토너에게 되돌아왔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
슬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문학도라면 자신의 지식이 흙을 다루는 데 딱히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스토너가 슬론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했다.
(......)
"모르겠나, 스토너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 그는 대학 도서관의 서가들 속에서 수천 권의 책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가죽, 천, 종이로 된 책들의 퀴퀴한 냄새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마치 이국적인 향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때대로 걸음을 멈추고 책을 한 권 꺼내서 커다란 손에 잠시 들고 있었다. 아직 낯선 책등과 표지의 느낌, 그의 손길에 전혀 반항하지 않는 종이의 느낌에 손이 찌릿찌릿했다. 그리고는 책을 뒤적이며 여기저기에서 한 문단씩 읽어 보았다. 책장을 넘기는 뻣뻣한 손가락은 이토록 수고스럽게 펼친 책을 서투르게 다루다가 찢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듯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 스토너가 캐서린 드리스콜의 소식을 들은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1949년 초봄에 동부의 대형 출판부에서 보낸 광고전단이 그에게 날아왔다. 거기에 캐서린의 책이 출판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에 대한 설명이 몇 마디 적혀 있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의 훌륭한 교양학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 미혼이었다.
● 그는 최대한 빨리 그 책을 구해 보았다. 그 책을 손에 쥐자 손가락들이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서 책을 펼치기도 힘들었다. 맨 앞의 몇 장을 넘기자 헌사가 보였다. "W. S.에게."
●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 그는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의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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